교전 일시 중지 협상이 이뤄지던 23일에도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흐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이 발생해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여러 지식인이 가자 전쟁에 대한 좌파의 반응을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최근 예루살렘 히브리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바 일루즈는 내가 하마스 공격에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는 전략으로 하마스 공격을 상대화한다며 이렇게 쓴다. “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잃은 고통을 (역사적) 맥락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비극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맥락화를 중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좌파들도 유대인들이 하마스 공격 이후 겪고 있는 충격과 슬픔에 함께해주었으면 한다.”
하마스 공격이 만든 트라우마적인 효과를 설명해주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다. 유대인들은 하마스의 공격 이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쇼아’의 기억을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을 보면서 이스라엘 건국 당시 겪었던 대재앙 ‘나크바’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느낀다.
일루즈는 하마스의 공격은 의도적인 ‘극악무도한 범죄’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은 의도되지 않은 ‘부수적 피해’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스라엘방위군이 가자지구에서 1만명 이상 팔레스타인인을 죽였더라도, 하마스가 1200명의 유대인을 죽인 것보다 덜 나쁘다는 주장이다. ‘부수적 피해’는 정말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설령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이 의도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구밀도가 높은 민간인 지역을 폭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또, 일루즈는 내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똑같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며 내 입장을 “탱고를 추려면 둘이 필요하다”로 압축한다. 내 답은 이렇다. 탱고를 추는 이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와 하마스다. 이들은 똑같지 않으며, 단지 탱고를 추고 있는 것뿐이다. 탱고라고? 음모론적이긴 하지만, 하마스와 이스라엘 정부가 이런 통화를 나누었다고 상상해보자. “이보게. 과거에 우리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대신 하마스를 은밀하게 지원했던 것 기억하나. 이제 하마스가 우리를 도울 차례네. 가자지구 근처의 유대인들을 공격해주게. 이스라엘 사법개혁 반대 시위와 지지부진한 팔레스타인 인종청소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거든. 당신들이 가자지구 유대인을 공격하면 우리는 희생자 행세를 하며 국가적 단합을 이끌어내고 인종청소를 더 확대할 수 있다네.” “좋네. 단, 조건이 있네. 복수 명목으로 가자지구 민간인들을 폭격하게. 그러면 전세계적으로 반유대주의가 커질 것이니 우리도 목표를 달성하는 셈 아니겠나.” 이 허구의 통화 내용은 가자 전쟁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원칙적으로 피해자에게는 반격이 허용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을 기회로 인종청소에 나설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인종청소와 하마스의 학살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차이를 보여준다. 제1세계에서는 9·11 테러나 하마스 공격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의 형태를 띤다. 사람들은 곧 일상 속으로 복귀한 뒤 트라우마적인 기억에 시달린다. 제3세계에서는 공포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일상과 하나가 된다. 이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상실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경험한 하마스 공격과 팔레스타인인들이 경험하는 폭력을 극악무도한 범죄와 덜 나쁜 문제로 구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런 상황에서 해법을 찾으려면 경쟁하듯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게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맴도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지우는 대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 서구 인종주의의 피해자라는 사실 위에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번역 김박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