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화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해당 이미지가 초연된 1964년 사진인지는 불분명하다.
[크리틱]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이상저온이 계속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가을이 가기 전에 기온이 영하권까지 내려가더니 낙엽 위로 첫눈이 내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진즉에 겨울 점퍼를 꺼내 입었다. 연말의 여유를 찾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캐럴을 듣기엔 맞춤으로 춥다. 마침 노트북을 들고 찾은 카페에도 시아(Sia)의 노래 ‘스노우맨’이 흐른다. 날씨의 스산함과 마감 압박을 달래줄 연말 감성의 선곡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따져보진 않았지만, 겨울을 맞는 의례 마냥 12월이 되면 캐럴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린다. 교인도 아니면서.
1960년대 발표된 최인훈의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도 이런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크리스마스 밤거리를 즐기려는 열아홉살 딸과 딸의 외박을 막으려는 아버지는 “옥아 넌 교인이던가?”, “아이, 누가 교인이래요?”, “그럼 크리스마스가 어쨌다는 거니?”, “크리스마스니깐 그렇죠”라며 ‘크리스마스’라는 텅 빈 기표로 꼬리 물듯 문답을 반복했다. 그 시절 아버지 세대에게 크리스마스는 온 나라가 야단이지만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날이었고, 자녀 세대에게는 역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빨간 글씨로 쓰인 공휴일이었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한국에서 공휴일로 지정된 때는 1949년이다. 당시 국내 기독교 인구는 3%에 불과했다고 한다. 1975년에야 공휴일로 지정된 석가탄신일과도 비교된다. 해방공간에서 우리의 대타자가 미국이었던 사정 외에는 설명할 길 없는 급작스럽게 틈입한 풍속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야간통행금지라는 기제와도 맞물린다. 통금제도는 1945년 질서유지 명목으로 공포된 미군정체제의 산물이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전국으로 확대돼 1960~70년대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장치로 작동했는데, 일년 중 야간통행이 허락된 날이 크리스마스였다.
최인훈의 소설에서 딸 옥이가 부득불 밤거리를 누려야 했던 이유는 자유와 일탈이 용인됐던 예외 상황 때문이었다. 그 해방감은 미술 현상 안에서도 발견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비주류로 독자 노선을 걸었던 작가 이승택(1932~)은 크리스마스라는 해방구를 1964년 작품의 동기로 삼았다.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화판’이라는 작품명 그대로 작가는 한강에 띄운 화판에 불을 붙였다. 화판이 불에 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이승택은 당시 작업을 ‘크리스마스의 007작전’으로 기억했다. 한 인터뷰에서 “한강에 불 지르는 건 이적행위로 걸릴 수 있는데, 좋은 기회가 없겠나 싶을 때 누가 크리스마스 날이 제일 느슨할 거다 해서 불 지르고 찍고 도망왔다”고 설명했다.
미술제도를 상징하는 화판을 태운 행위는 자체로 전복적인데, 1964년이라는 시점 또한 필연적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반정권 투쟁 차원으로 격화됐던 해였다. 투쟁의 주체였던 대학생들은 화형식 같은 선례를 찾기 힘든 저항기술을 동원했다. 교내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태웠고, 일본상사로 몰려가 광고물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승택이 일상의 감시가 해제된 크리스마스를 택해 화판을 태운 행위는 예술 밖 시대의 맥락과 씨줄날줄로 엮인다. 캐럴을 듣다 1964년의 전위미술에까지 생각이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