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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펑크의 여왕’이었던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등록 2023-12-28 15:52수정 2023-12-29 02:38

[나는 역사다] 비비언 웨스트우드(1941~2022)

 아버지는 노동자, 어머니는 점원이었다. 예술학교에 잠깐 다니다 말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다만 반항하는 학생들을 특별히 아꼈다.” 웨스트우드는 말했다.

첫 남편과 헤어지고 맬컴 매클래런이라는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영국 런던에 옷가게를 열었다. 처음에는 가게 이름이 ‘렛 잇 록’이었다(‘록’이라는 말이 가게 이름에 들어간다). 가게는 여러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한때 ‘섹스’라고 걸었다. 반항적인 노동계급 젊은이들이 옷을 사러 왔다. 남자친구 매클래런은 단골손님들과 의기투합해 펑크록 밴드를 결성한다. 유명한 섹스피스톨스의 탄생이다. 매클래런은 매니저가 되고 웨스트우드는 이들이 입을 옷을 디자인했다.

펑크스타일은 음악에서도, 패션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던 거리에서 펑크족을 처음 보고 충격받았다. 펑크는 혁명이었다. 그 원조가 웨스트우드다.” 모델 나오미 캠벨의 회고다. 그런데 펑크가 너무 인기를 누리는 바람에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펑크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기성정치를 조롱하던 웨스트우드는 훗날 여왕에게서 훈장과 작위를 받는다. 물론 웨스트우드가 주류에 포섭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훈장을 받던 날에도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니까.

웨스트우드는 매클래런과 결별하고 새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펑크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갔다. 세상과 타협한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내는 방식이 정교해졌다. 해적 옷 같은 역사 속 패션을 현대에 되살려 재해석하면서도, 도발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사회적인 관심도 시들지 않았다.

펑크 이후에도 현대 문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 웨스트우드는 패션을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생각했다(2005년에는 숫제 ‘프로파간다'라는 이름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소비 지상주의를 비판했고 미투 운동과 함께했다. 기후변화에 관심 많은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다. 작품과 퍼포먼스로 자신의 주장을 알렸다. 2022년 12월29일 여든한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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