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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검찰과 재벌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곽정수

등록 2006-04-07 18:06수정 2006-06-09 15:59

곽정수 정책금융팀장
곽정수 정책금융팀장
편집국에서
“바보 짓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갑작스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검찰 안에서 터져나온 말이다. 정 회장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훨훨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검찰은 바로 “현대차 수사는 경영권을 이용한 부의 축적과 불법적인 부의 이전을 우리 사회에서 스크린(심사)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탈법적 경영권 승계를 정조준했다.

검찰에게 재벌은 마지막 ‘성역’이다. 그 중심에는 재벌의 주인이라는 총수일가가 있다. “삼성의 서초동 출장소.” 검찰이 2005년 말 엑스파일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삼성 관련자들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을 때 쏟아진 탄식이다. 2004년 5월 불법 대선자금 수사 종결 때 한 시민단체는 “경제 권력인 재벌로부터 독립한 검찰을 보고 싶다”고 호소했다. 검찰은 수백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재벌 수사에서 총수는 직접 조사도 하지 않고 심부름꾼인 임원 한 사람씩만 불구속하며 면죄부를 줬다.

검찰이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의 비밀금고를 열자 수십억원의 뭉칫돈과 비자금 장부가 쏟아졌다. 대선자금 수사가 끝난 게 불과 2년 전인데 벌써 교훈을 잊었냐는 탄식이 터졌다. 하지만 과연 기업만 탓할 일인가? 검찰이 엄정한 법의 잣대를 적용했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검찰은 정 회장의 미국행에 흥분하지만, 역시 자업자득이다. 지난해 9월 이건희 회장의 미국행을 법대로 처리했더라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검찰의 재벌 봐주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총수 아들에게 주식을 헐값으로 넘긴 에버랜드 사건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을 지시한 총수 등에 대한 후속수사는 지지부진하다.

과연 이번에는 ‘재벌=성역’이라는 등식이 깨질 것인가? 일단 일선 검사들의 각오는 비장하다. “총수 부자를 모두 감옥에 보낸다고 해서 국민들이 현대차 대신 다른 차를 사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기업과 부도덕한 총수 일가를 단절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 정관계 로비 리스트를 내놓겠다는 현대차그룹의 유혹도 뿌리쳤다는 얘기가 들린다.

기업에게도 새 패러다임이 요구되기는 마찬가지다. 재벌은 비자금 사건 때마다 정치권의 요구 등 어쩔 수 없는 현실 탓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임이 드러났다. 글로비스는 4년 동안 수백차례에 걸쳐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상당 부분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쓰였다고 한다. 이제 재벌도 ‘오너=기업’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깰 때가 됐다. 정 회장의 현대차 지분은 5.2%에 불과하다. 정의선 사장의 기아차 지분은 1.99%에 그친다. 엄밀히 말해 오너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통해 절대권한을 행사한다. 또 기업을 마치 개인 소유물처럼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과정에서 온갖 탈법을 저지른다. 현대차는 그동안 삼성이 세금 없는 대물림으로 곤욕을 치르는 것을 눈여겨봐 왔다. 하지만 그 대안은 아쉽게도 총수 개인회사를 세운 뒤 계열사 지원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몰아주는 또다른 변칙이었다. 총수 아들이라고 해서 경영능력 검증 없이 어린 나이에 최고경영자에 오르는 봉건왕조식 경영권 승계도 바뀌어야 한다.

정 회장은 검찰의 압박이 갈수록 더해지자 주말께 조기 귀국 방침을 밝혔지만, 귀국 보따리에는 이런 근본적인 ‘현대차 해법’이 포함돼야 한다. 사회공헌기금 헌납처럼 돈으로 면죄부를 사려한다거나 일시적 지배구조개선 같은 땜질식 처방은 곤란하다. 진정한 기회는 위기 뒤에 오는 법이다. 검찰이 법대로 하고 재벌이 바뀌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곽정수 정책금융팀장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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