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북한 학계의 연구 결과를 접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1960년대 후반 북쪽의 저서나 논문을 접할 수 있는 비밀 서고가 있었다. 국학계 원로인 벽사 이우성(81) 선생의 연구실이 그곳이었다. 벽사가 일본에서 몰래 복사해 온 북한 쪽 연구자료를 독차지한 사람은 그에게 한문을 배우러 다녔던 안병직(69) 당시 서울대 상대 교수였다.
한국경제사를 연구하던 젊은 안 교수는 당시 ‘남쪽보다 수준이 높고 논리도 정연했던’ 북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심취’했다. 한때 학계와 진보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안 교수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의 근대 사회구성체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한 것은 내 의견이 아니라 북의 연구와 마오쩌둥(모택동) 문헌을 요약해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역사비평 2002년 여름호 대담)
남의 견해를 소개한 것이어서 버리기도 쉬웠을까. 80년대 중반 그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폐기하고 정반대인 ‘중진자본주의론’을 내놓았다. 일제 식민지를 암흑기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뿌리로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된 것은 중진자본주의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변신의 계기는 단순했다. 84년 일본 나카무라 사토루 교수의 ‘근대 세계사상의 재검토’라는 논문 한편을 ‘우연히’ 읽고서부터였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한국 경제가 망하지 않고 더욱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이론에 회의를 품고 있던 차에 나카무라 교수의 논문은 “엄청난 쇼크”였다고 했다.
이후 그는 학문의 틀, 사상까지도 완전히 바꿨다. 중진자본주의론의 원조인 나카무라 교수가 학문적 방법론으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유지한 것과도 다르다. “연옥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그는 이때부터 민족주의자, 진보주의자 대신 국제주의자, 보수주의자를 자처했다. 동유럽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제자들을 불러 진보이념을 버리라고 설득했다. 자신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길을 ‘잘못’ 접어든 사람들에 대한 학자적 양심 때문이었다고 했다. 더러 성공하기도 했다. 급진적 운동권이었다가 지금은 뉴라이트 주창자가 된 김문수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가 대표적이다.
안 교수의 이러한 극단적 변화에 대한 평가는 ‘자본으로의 투항, 변절’이라는 데서부터 ‘대학자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주장’까지 다양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충격에도 불구하고 학계가 그의 자기부정에 대해 드러내놓고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것은 정치꾼의 처세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학문이 업인 학자의 자기성찰과 탐구의 결과일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하지만 서울대 정년퇴임(2001년) 이후 두번째로 일본을 다녀온 뒤 그가 보여주는 행보는 “학자는 정치의식이 지나치면 안 된다”(앞의 역사비평)는 평소 소신을 무색하게 한다. 논문과 저서로 말하기보다는 “노무현 정권은 건달정부” 등 논리적 뒷받침이 없는 생짜 발언을 언론에 쏟아놓는가 하면 ‘한-미 동맹 강화’ 등 자신의 탐구영역을 벗어난 주장도 곧잘 한다. 최근에는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전향한 좌파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뉴라이트재단의 이사장을 맡았다. 재단 출범을 앞두고 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좌파 진영의 대표 매체였던 〈창작과 비평〉이나 〈역사비평〉과 치열한 사상전을 벌일 것”이라며 “다시 피가 끓는다”고 말했다. 그 자신이 ‘만해 한용운의 독립사상’(70년 겨울호)을 시작으로 90년대 말까지 8건의 논문을 발표했던 창비는 역비와 함께 한국 지성계의 보고다. 탈이념 시대에 피끓는 노전사의 투쟁 선언은 여러모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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