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의 글은 가급적 고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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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획팀장을 맡고 있는 탓에, 독자들의 전화를 많이 받는다.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종종 있는데, “○○○씨의 칼럼이 〈한겨레〉의 견해냐”고 물어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이런 경우 열이면 열, 질문이 아니라 항의에 가깝다.
한겨레 논설위원이나 기자가 쓴 칼럼은, 설령 내부 구성원 사이에 이견이 있더라도 일정 부분 ‘한겨레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외부 필자의 칼럼은 어떤가?
4월20일치 신문 ‘100°’에 실린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 게 학생 탓이랴’라는 제목의 칼럼을 두고 교사들의 항의 전화가 잇따랐다. ‘저공비행’이라는 고정란에 실린 칼럼인데, “무슨 의도로 교사를 모욕하는 칼럼을 실었느냐”는 항의성 질문들이었다.
내부 필진 칼럼과 성격 달라
전화를 받고 다시 밑줄을 그어가며 여러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눈에 거슬리는 자극적인 표현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교사들이 불쾌감을 느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점 사과드린다.
하지만 글의 전체 맥락을 볼 때, 이 칼럼이 교사를 폄하하려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사를 하나의 ‘직업인’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직업 윤리’에 충실할 교사 양성을 위한 여건 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라는 것이다. 비단 교사뿐 아니다. 직업 윤리를 어기는 일부 성원이 전체를 욕먹이는 사례는 기자·교수·의사·변호사 등 모든 전문직종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거친 표현 때문에 애초 글의 취지와 달리 오해를 산 점이 안타깝게 생각된다.
다시 ‘외부 필자의 칼럼과 한겨레 논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와 답을 하면, 다음과 같다.
외부 칼럼은 논설위원이나 기자가 쓰는 칼럼과 달리 필자 개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내부 칼럼은 여러 단계의 ‘데스크’를 거쳐야 지면에 나올 수 있는 반면, 외부 칼럼은 보내 온 글에 될수록 손을 대지 않는다. 글을 처음 맡길 때는 이전에 쓴 글과 주변의 평판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엄격히 선정하지만, 일단 필자가 되면 최대한 재량에 맡긴다는 것이다. 외부의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지면에 반영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다.
또 같은 외부 칼럼이더라도 글의 성격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다. 한겨레에는 여러 종류의 외부 칼럼이 있는데, 크게 보면 1섹션에 실리는 칼럼과 2섹션에 실리는 칼럼으로 나눌 수 있다. 기명칼럼을 비롯해 ‘아침햇발’ ‘경제전망대’ 등이 전자이고, 이번에 논란이 된 ‘저공비행’이나 ‘세설’(世說) 등이 후자에 든다. 칼럼 문패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섹션의 칼럼에선 세상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표출하게 한다. 올해 초 ‘세설’에 실린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칼럼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를 옹호하는 글을 연거푸 네차례나 썼는데, 여러 독자들이 “한겨레의 논조와 맞지 않는 글을 지면에 계속 싣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지면에서 자유로운 토론 가능
〈조선일보〉를 비롯해 몇몇 신문들은 외부 칼럼의 아래에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한겨레도 지난해 봄 칼럼 필진과 형식을 전면 교체하면서, 이런 설명이 필요하냐를 놓고 사내 여론을 조사했다. 55%가 반대해 채택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비칠 수 있다” “과연 편집 방향과 100% 일치하는 글이 있을 수 있겠느냐” 등이 주된 이유였다. 대신 칼럼에 이견이 제기될 경우 반론을 적극적으로 실어 토론 문화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가는 게 낫다고 결론내렸다.
이번 칼럼의 반론으로 이원희 한국교총 수석 부회장의 글을 실었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4월28일치 신문 29면이나 〈인터넷 한겨레〉를 보시기 바란다.
안재승 편집기획팀장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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