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Hyo-sun, Executive Editor The Hankyoreh
김효순칼럼
재일동포 2세로 도쿄경제대 교수인 서경식씨의 평론 등을 모은 신간 〈난민과 국민 사이〉에는 세상을 떠난 몇 사람에 대한 추도글이 실려 있다. 그가 기렸던 인사 가운데 야스에 료스케 전 이와나미서점 사장이 있다. ‘유학생 간첩 사건’으로 포장된 자신의 형 서승·서준식씨의 구명을 위해 애써준 야스에에게 보내는 고마움의 뜻이 담겼다. 야스에가 1998년 1월 타계했을 때 〈한겨레〉도 추모글을 실었다. 우리말을 모국어로 배우지 못하고, 정주처가 불안정해서 사실상 난민이라고 여기는 서 교수의 처지와 한겨레의 입지가 같을 수야 없겠지만, 한 사람을 놓고 각기 애도의 글을 썼다는 점에서는 뭔가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한 10여일 지나면 〈한겨레〉는 창간 18돌을 맞는다. 지난 18년 동안 국내 위상이나 취재 대상과의 관계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듯이 일본과의 만남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쇳가루 냄새가 풍기는 서울 양평동 공장지대의 한 모퉁이에서 8쪽짜리 신문을 찍던 창간 초기 시절,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젊은 외교관이 찾아왔다. 아마도 2등 서기관이나 3등 서기관으로 기억되는데 신생 신문으로서 일본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 파악하려고 왔던 것 같다. 그 뒤 한겨레와 대화를 지속하려는 창구는 1등 서기관, 참사관, 공사로 서서히 올라갔고, 대사와의 만남도 낯설지 않게 됐다. 신문의 위상이 격상된 만큼 제도권에 정착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럼에도 한겨레가 대일관계에서 새로운 차원의 교류를 열어 지속시켜 왔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린내 나는 정경유착으로 지칭되던 기득권층 사이의 제한된 교제가 아니라, 비주류·비제도권이었던 두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사회 사이의 교류를 넓혀온 것이다. 창간한 지 4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일본에 정식 지국을 개설한 한겨레를 따듯하게 맞이해준 이들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전후 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쳐온 인사들이다. 대표로 몇사람만 들면 앞에서 언급한 야스에를 비롯해 와다 하루키, 다카사키 소지 같은 교수들, 사할린 잔류 동포들의 귀환운동을 도맡다시피 한 변호사 다카기 겐이치, 쇼지 쓰토무 목사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반한·친북’ 인사라는 딱지가 씌워져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입국비자가 번번이 거절되는 수모를 당했다.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에도 앞장섰던 이들이 정신적 연대감을 가졌던 국내 인사들을 만나려고 고대했다가 입국이 불허됐을 때 느꼈던 허망함을 헤아렸을 한국인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한겨레의 탄생과 존재를 한국인들보다도 더 기뻐하고 부러워했던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 낯뜨거운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고 비아냥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로만 듣던 한겨레의 실물을 보고 싶다며 본사로 찾아와 한겨레를 이 정도로 키운 구성원들과 일반 주주, 나아가 한국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열어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으로 단죄한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인 마쓰이 야요리도 그런 일본인의 한 사람이다. 지난해 5월 한-중-일 3국의 공동 역사 교재인 〈미래를 여는 역사〉의 국내판이 한겨레에서 나온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독도 영유권, 과거사 정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을 놓고 한-일 사이에 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두 나라 정부가 정면 대립으로 치닫게 되면, 민족주의적 정서가 모든 것을 덮어버려 양식 있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대화가 어렵게 된다. 그것은 두 나라에 두루 바람직하지 않다.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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