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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연구윤리 증거 우위의 원칙 / 이근영

등록 2006-05-05 20:00수정 2006-06-09 15:58

이근영 사회부 기자
이근영 사회부 기자
편집국에서
달포 전 교육부에서 전국 대학 교수 1만4천여명에게 330쪽짜리 책자를 한 권씩 전달했다. 내용은 미국 보건복지부 연구윤리국(ORI) 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연구윤리 소개>라는 제목의 이 책이 ‘윤리 논란’을 일으켰다.

한 교수는 “원저의 서지 사항을 찾아볼 수 없고, 원저의 진짜 저자들을 ‘도와주신 분들’로 둔갑시켜 …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저작권 보호법을 어긴 ‘불법 저작물’인 것임이 분명하다”는 글을 과학전문 인터넷 언론에 기고했다. “교수들에게 윤리를 소개하겠다는 책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라는 대목은 책자를 만든 교육부 공무원을 ‘기가 막히게’ 한 모양이다. 그는 “원저는 자료의 발간처가 출처 공개와 함께 비상업적 사용을 허용하고 있으며 … (도와주신 분들) 이름 아래 저자임을 분명히 명시했다”는 반론을 해당 인터넷 언론에 보냈다. 저자를 왜 저자라 ‘부르지 못하고’ 도와주신 분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쪽의 공방은 ‘연구윤리’에 극도로 민감해진 세태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울대 징계위원회가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조작과 관련된 교수들에게 징계를 내리면서 ‘줄기세포 조작 파동’으로 연구윤리 과민증에 빠져 있던 학계는 진정 국면을 맞는 분위기다. 징계가 ‘솜방망이보다 약한 면봉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국가공무원이어서 파면과 해임 다음으로 정직이 가장 중한 벌이어서”라는 서울대의 해명에 대한 시비도 잦아들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도 제럴드 섀튼 교수의 행위를 조작·변조·표절 등 대학 내규에 규정된 ‘과학적 부정 행위’로 해석하기 곤란해 ‘연구 비위 행위’라고 짚고 넘어갔듯이, 연구부정 행위에도 형사사건처럼 ‘애매모호하므로 무효’ 원칙과 ‘지나치게 광범위해 무효’ 원칙이 적용돼야 함이 공감을 얻는 듯하다.

최근 과학기술부가 ‘연구윤리·진실성 확보를 위한 가이드라인’ 초안을 발표한 것은 연구현장에도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법률이 없이는 형벌도 없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세운다는 점에서 기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초안이 부정 행위에 대한 혐의 입증 책임을 해당 연구기관과 조사위원회에만 둔 것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돼 우려가 생긴다.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부실한 연구노트와 솔직하지 못한 관련자들의 진술에 부닥쳐 속시원한 조사를 못해내, 진실 규명은 검찰의 손에 넘어갔다. 담당 연구원은 줄기세포 조작이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이런 정황은 검찰로 하여금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황 교수에게 ‘혐의 없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넣고 있는가보다.

과학적 연구 활동은 일반 형사사건과는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 과학적 행위는 ‘의도·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로 이뤄진다. 연구활동 결과의 사위 여부는 ‘의도 없었음’으로 면죄되지 않는다. 정확한 자료와 기록으로 증명돼야 한다. 연구윤리 가이드라인은 ‘증거 우위의 원칙’에 토대를 둬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미국 복지부 연구윤리 규정처럼 입증의 책임을 증거 우위의 원칙에 따라 피조사자에게도 지워야, 외부기관(검찰)이 과학적 사실을 ‘수사하는’ 상궤를 벗어난 상황이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근영 사회정책팀장 ky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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