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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경제전망대] 엿기름집 자손의 저주 / 이봉수

등록 2006-05-09 19:45수정 2006-05-09 20:43

이봉수 런던대 박사·경제저널리즘
이봉수 런던대 박사·경제저널리즘
경제전망대
〈인구론〉의 저자 맬서스는 엿기름집 후손이다. 필자도 땅이름과 사람이름 등의 어원에 취미가 있지만, 맬서스의 어원은 케인스의 해석을 빌린 거니까 믿어도 좋으리라. 맬서스(Malthus)는 ‘Malt(엿기름)+hus’의 합성어이고, ‘Hus’는 ‘House’(집)의 어원이니, 조상이 애초에 엿기름 제조업자였을 거라는 해석이다.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 선배인 맬서스의 탁월함과 함께 한계도 잘 알고 있었고, 아동수당제 도입 등 국가 개입을 통해 빈곤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빈곤은 인구법칙이 내린 불가피한 운명이며, 인간사회는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다수로 나뉠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빈곤 구제와 사회개혁 노력도 결국 허사가 되거나 더 해로운 결과를 빚는다는 주장이다. 인구를 줄이려면 사망률을 높여야 하고, 그러려면 빈민에게 청결교육을 하지 말고, 그들이 사는 도시의 골목길을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북적대게 해 전염병이 돌게 해야 한다고 악담을 퍼부었다. 목사로서 부자였던 그는 가난뱅이들이 부양능력도 없으면서 자식을 많이 낳아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것을 미워한 부자들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합계 출산율 1.08명’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게 된 이유는 이런 부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에 뿌리가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각종 조사 결과들은 출산 기피가 주로 보육·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에서 기인함을 말해준다. 그들의 부담을 덜기 위한 공교육과 서민위주 주택정책, 그리고 주택난의 뿌리인 도시과밀 해소책 등은 늘 성장 또는 경쟁 논리에 떠밀린다. 맬서스의 저주가 21세기 한국에서 실현되고 있는 걸까? 부자들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증세에 강력히 저항하고, 정부는 공교육과 공적 의료체계를 무너뜨릴 우려가 높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매진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런 매정한 사회 분위기와 부실한 국가 제도에 대한 가정의 반란이요 자구책이다. ‘다 제 먹을 것 타고난다’는 속담과 ‘규모의 경제’를 믿고 1996년 셋째아이를 낳은 필자 부부는 ‘셋째부터는 의료보험도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제왕절개 수술비를 ‘바가지’ 썼다.

<인구론>의 배경이 된 영국도 지금은 국가와 사회가 가족과 공동으로 자녀를 키운다는 인식이 일반화해 있다. 임대료 싼 공공주택이 널리 보급돼 있고, 아이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전기·가스·수도료 등이 체납돼도 공급을 중단할 수 없다. 학교에서 교재는 물론이고 문방구까지 공용으로 사용하고, 숙제 해 오라며 A4 용지 한 장까지 들려서 집에 보낸다. ‘아버지 육아휴직제’가 도입된 것은 물론이고 매일 오후 3시 반에는 자녀들을 하교시키기 위해 누구나 직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건 한국에선 욕이지만 영국에선 권리다.

마침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2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영국과 유럽의 저출산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그래도 영국의 출산율은 2004년 기준 1.77명으로 우리보다 훨씬 높은데도 더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영국인들은 여론조사에서 24%만이 출산·보육과 관련한 정부 지원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유럽에서는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낮은데, 한국에서는 교육·소득 수준이 높은 서울 강남에 외동아이가 드문 건 교육·주거비의 개인 부담능력이 출산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노총각 때 <인구론>을 써 가난뱅이 다산자들을 비난했던 맬서스도 결혼 뒤 세 명의 자녀를 뒀다.

이봉수/영국 런던대 박사·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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