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기획위원
손석춘칼럼
절망스럽다. 유월항쟁에 몸을 던졌던 한 40대의 회고다.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386’은 토로한다. “성인이 된 뒤 대한민국이 이렇게 절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왜 그럴까. 그의 친구들이 권력 핵심에 줄줄이 들어가 고위관료가 되고 국회의원으로 행세하는 오늘, 왜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걸까.
주름이 깊어가는 후배는 잘라 말했다. “지금이 가장 암담하다.” 뜬금없는 소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찹찹히 톺아보라. 군부독재가 꼭뒤 누르던 시기,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야당’이 집권하면, 달라지리라는 실낱 희망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386은 덧붙였다. “하다못해 1980년대에는 경제 규모라도 성장했다. 90년대에도 정보기술이 발전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뒤 어디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지금 이 땅의 삶을 보라. ‘직장’구하기 쉽지 않다. 가까스로 일자리 얻어도 언제 ‘희망퇴직’의 절망과 마주칠지 모른다. 비정규직은 무장 늘어간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국회를 장악한 집권세력은 곳곳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희망일까. 온갖 꾸밈말을 붙여도 명백한 역사의 후퇴다. 물론, 야당에 진보정당도 있다. 하지만 부자신문의 왜곡과 방송의 외면으로 민주노동당은 유권자들에게 낯설다. 민중의 삶을 바꿀 ‘집권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엄연한 현실이다.
더러는 5월 지방선거를 분석하며 진보세력의 궤멸이라 언구럭 부린다. 진보의 무능을 비웃는다. 명토박아 둔다. 아니다. 노 정권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 노 정권의 무능을 진보의 그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이 부자신문의 덫에 걸렸음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진보는 아직 어떤 권력도 지녀보지 못했다. 현실을 바꿀 어떤 자리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 정권과 일부 386 탓에 진보세력이 싸잡아 손가락질 받고 있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문제는 진보가 매도당함으로써 민중에게 오는 게 절망뿐이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민주세력, 진보세력이 단결해야 할 까닭이다. 더러는 설익은 주장이라고 나무란다. 불가능한 단결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눈 홉뜬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모든 진보가 단결할 수 있는 3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과거 불문이다. 과거에 어떤 ‘정파’, 어떤 조직에서 일했는지 제발 따지지 말자. 운동 여부도 가리지 말자.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려는지가 고갱이다.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은 이 땅에서 결코 둘일 수 없다. 하물며 서로 다툰다면 얼마나 생게망게한 일인가.
둘째, 신자유주의 반대다.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사적으로 이미 정점을 지나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는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의 대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자신문의 눈으로 본다면 남아메리카 대륙은 온통 빨갛다. 신자유주의의 완결판인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에 모두 손잡고 힘 있게 싸워야 옳다.
셋째, 6·15 공동선언 실천이다. 진보세력 내부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이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조선노동당에 대한 시각도 다르다. 하지만 민족통일을 함께 일궈갈 상대로 북을 사고하는 선에서 단결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동선언을 실천하려면 남과 북 모두 벅벅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다. 저 기만의 날, 6월29일 새벽에 치욕을 삼키며 쓴다. 진보가 왜 힘을 모아야 옳은가. 진보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 받는 민중이 있어서다. 민족이 위기를 맞아서다. 절망스러워서다.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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