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기획위원
손석춘칼럼
나라 망치는 언론. 시나브로 퍼져가는 개탄이다. 아예 신문이길 포기했다는 우려마저 나돈다. 보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한다고 “북한보다 더 북한 같은” 세력이라 몰아치는 〈동아일보〉를, 전국교직원노조를 ‘사악한 종교집단’으로 낙인찍는 〈조선일보〉를, “북한 역사관의 세뇌기구”라 훌닦는 〈중앙일보〉를.
저들의 광기 어린 여론몰이로 나라 안에 풀어가야 할 문제들은 더 얽혀 간다. 공영방송도 오십보백보다. 부라퀴들에 맞설 의지도 없다. 노무현 정권은 어떤가. 얼핏 신문권력과 갈등을 빚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 마찰은 정권의 이해관계가 걸릴 때다. 정작 주요한 사안에는 무람없이 의기투합이다.
그렇다. 신문권력만이 아니다. 나라 망치는 신문은. 결코 덜하지 않은 ‘신문’이 더 있다. 〈청와대브리핑〉과 〈국정브리핑〉이다. 대통령 비서실과 국정홍보처가 발행처다. 두 매체를 굳이 ‘권력신문’이라 부르는 까닭은 또렷하다. 정책을 책임지고 집행해 나가야 할 공무원들이 어설프게 언론인 흉내를 내고 있어서다. 기실 노무현 정권의 특징이다.
권력을 위임받았음에도 민심을 반영해 정책을 만들고 실천할 의지가 흐릿하다. 반면에 말의 성찬은 기름지다. 실천은 거꾸로다. 대표적인 게 양극화 해소라는 ‘특집 기사’다.
싸우면서 닮아가는 걸까. 권력신문은 신문권력과 비금비금하다. ‘사주’(대통령)에게 굴종하는 행태도, 상대의 논점을 온전히 이해조차 못한 채 매도하기도, 모든 걸 상대 탓이라며 도끼눈 부라리는 풍경까지 닮았다. 인터뷰 조작도 서슴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고도 신문권력에 ‘저주의 굿판’이라는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딱하고 민망스럽다.
권력신문에서 이백만 홍보수석은 주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는 정부 노선은 ‘친미 자주’란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대통령의 참모답다. 이어 으름장이다. “반미주의자들의 국민선동이 큰 문제다.”
권력신문은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실의 ‘칼럼’도 대서특필한다. ‘포스코 사태’를 계기로 노동운동이 달라져야 한단다.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지청구로 들먹인다. ‘노동운동의 각성’을 부르댄다. 기막힌 일이다. 청와대가 노동운동을 ‘훈계’하며 언구럭부릴 때, 40대 중반의 건설노동자는 권력이 휘두른 폭력으로 목숨을 잃고 있었다.
권력신문의 ‘주필’ 이병완 비서실장은 ‘사주’의 총애를 듬뿍 받는 인물이다. 신임 받는 걸 탓할 깜냥은 없다. 신문권력 주필도 사주의 굄을 받는다. 다만 참으로 놀랄 일이다. 그가 신문권력의 색깔공세를 답습한다.
보라,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진보를 가장한 극좌세력’으로 되술래잡는 비서실장을. 이성적 반론은 찾기 어렵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최고경영자대학’을 위해 제주도까지 간다. 특급호텔에서 극우와 극좌를 싸잡아 비판한다. “참여정부는 두 극단세력들로부터 매일같이 저주와 비난, 폄하와 왜곡, 나아가 타도의 대상”이란다. ‘극좌세력’이 정부가 자기 뜻을 따르지 않아 ‘저주’한다는 논리다. 케케묵은 색깔론 아래 노 정권은 어느새 “최대 피해자”로 둔갑한다.
이 실장에게 묻는다. 누가 극좌인가. 농민에 이어 노동자를 때려 죽이고도 전혀 뉘우침 없는 파렴치 정권을 비판하는 게 극좌인가. 여론을 생먹으며 나라 명운이 걸린 정책을 강행하는 데 반대하는 게 극좌인가.
찬찬히 톺아보자. 권력신문의 사주에게 해바라기하는 저들은 신문권력의 논객과 얼마나 다른가. 신문권력과 권력신문의 닮은꼴 싸움에 민중은 없다. 그 결과다. 권력신문에 아첨이 가득하지만 대통령 지지도는 바닥이다.
정권을 위해서라도 권한다. 혈세 챙기며 ‘칼럼’이나 댓글 쓸 시간 있거든 정책에 전념하라. 신문권력만으로 이미 차고 넘친다, 나라 망치는 곡필은.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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