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김선주칼럼
어느 날 <문화방송>이나 <한국방송>에서 낯익은 앵커들과 기자들이 사라지고 앵커 출신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당의장이나 전여옥 한나라당 전 대변인이 보도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 밖에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서 뉴스도 진행하고 토크쇼도 하면서도 아무런 관련 설명이 없다면 그것을 우리는 문화방송이나 한국방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에서 그와 유사한 사태가 실제로 벌어졌다. 비록 작지만 무게 있는 시사주간지인 <시사저널>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져 팔리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짝퉁, 시사저절’ 기사를 보고 이 잡지 899호를 샀다. 모든 주간지에는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사장부터 편집장과 기자들, 사진팀, 디자인팀, 광고·판매 진행요원까지. 여러 차례 편집회의를 거치며 제작진 모두 참여하는 방식으로 표지기사도 정하고 전체적인 논조의 균형도 유지한다. 그러나 899호에는 발행인 겸 편집인 금창태라는 이름만 유일하게 나와 있다. 왜 어째서 이런 잡지가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도 없다. 기사를 훑어보았다. 정치권에서 맹활약을 했던 인물이 편집위원으로 표지기사를 썼다. 현직에서 떠난 지 오래된 70대 언론인 이름도 보이고 다른 매체 기자들의 이름도 들어있다. 잡지가 가져야 할 총체적인 의견 조율과 편집회의라는 것을 거치지 않은 누군가 한 사람의 시각으로 북치고 장구친 개인잡지였다. 이게 시사저널인가?
몇 달 전 삼성 관련 기사를 사장이 독단으로 삭제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사쪽과 기자들 사이 편집권을 둘러싼 대립이 몇 달째 이어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기자들이 최종적으로 파업선언을 했다. 사쪽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체인력이랄 것도 없는 인물들을 급조해서 잡지를 만든 것이다.
외환위기가 터졌을때 시사저널은 부도가 났다. 사장은 도망가고 기자들은 월급을 못 받았다. 그러면서도 결호 한 번 없이 1년 반을 버텼던 것은 시사저널의 명예였고 기자들의 자부심이었다. 서른 명의 기자가 열 명으로 줄고 밥을 굶어가면서도 그들은 시사저널이라는 이름을 지켰다. 그런 그들이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편집권은 오롯이 기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발행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함께 가는 것이고 총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주에 나온 이 잡지는 편집권은 오직 발행인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이 사태를 두고 언론인들이 침묵하는 것이 두렵다.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고 발행인만의 개인잡지가 발행되었는데, 언론이 침묵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언론에는 다른 언론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 공인의 사생활도 공적인 것이 되는 마당에 시사주간지의 내부사정이라는 것이 시사저널 한 잡지의 사적인 문제일 수 있는가. 비겁한 동업자의식이고 야합이다. 언론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태가 왜 기삿거리가 안 되는가. 이 철저한 무관심과 기자들의 침묵이 소름끼친다. 당장 시사저널을 사 보라. 당신이 기자라면 부들부들 떨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1974년 동아·조선 언론사태 때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기자들을 내쫒고도 신문들은 나왔다. 그때부터 기자들의 몸조심이 시작되었고 언론사주들의 노하우도 생겼다. 기자 길들이기가 시작되고 기자들은 고급 월급쟁이에 만족하면서 자사 이기주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때 한국언론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고 나는 본다. 지금 그 다리를 통째로 잘라낸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침묵하는 언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언론, 언론인임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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