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국제팀 기자
편집국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참모였던 리처드 위슬린은 1980년 대선 때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여론조사를 해보고 현안에 대한 레이건의 뜻에 동의하지 않던 유권자들도 그를 지지하겠다고 하는 걸 알게 됐다. 이른바 ‘레이건 데모크랫’ 즉 레이건을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의 존재다. 레이건은 현안보다는 보수적 가치에 대해 말해왔다. 가치를 소통하는 것이 특정한 정책적 견해보다 더 유효했다. 레이건은 일관된 가치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진정성이 있게 보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가치, 소통, 진정성, 신뢰 이 네가지 요소는 유권자들을 레이건과 연결시켰다. 레이건과 유권자의 가치가 반드시 일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올해 초 펴낸 <생각의 요점>이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미국의 진보세력들이 1980년대 이후 보수세력에 비해 일관된 가치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해 이를 위한 프레이밍, 즉 사고의 틀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통해 미국의 진보세력들이 보수세력들이 만든 프레임에 빠져 선거에서 잇따라 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01년 2월7일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반대한 국회연설을 겨냥해 “정권이 언론과의 전쟁선포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다음날 “언론과의 전쟁불사 발언을 할 때 잊어버리고 ‘조폭적’이라는 말을 안했다”며 “언론이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내리치고 있어 ‘조폭적 언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까지 말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들이 거품을 물고 그에게 ‘몰매’를 내리쳤음은 물론이다. 그 ‘몰매’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대권후보로 성큼 내달리게 했다.
삼당합당 반대, 기득권을 던져버린 영남 지역 출마 등과 겹쳐지며, 그는 특권과 지역구도 폐지라는 일관된 ‘가치’를 대중들에게 ‘소통’시키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 ‘신뢰’를 받은 것이다. 특히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은 ‘족벌언론’ ‘조폭언론’이라는 그의 말을 비난하면 할수록 그의 메시지만을 전파하는 덫에 빠져버렸다. 그의 프레임에 빠진 것이다. 선거에서 그의 행정수도와 후보 단일화도 상대방을 집어삼킨 프레임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그는 특권과 지역구도 철폐라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했다. 소득 3만달러 시대 등은 그가 전파했던 가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틀거리였다. 오히려 대중과 소통하던 그의 직설화법을 공격하는 조·중·동에 일일히 대응하면서, ‘막말하는 대통령’으로 프레임됐다.
그의 가치에 맞는 의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지역균형발전은 특권과 지역구도 철폐라는 그의 본래 가치와 가장 어울리면서도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였다.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이라는 희안한 논리로 행정수도를 위헌결정했을 때 오히려 지역균형발전론을 특권과 지역구도 폐지라는 프레임으로 만들어 더 밀어붙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를 빨아들이다시피 하고 사회 위화감을 낳는 ‘강남시스템’ ‘강남공화국’ 해체도 같은 프레임에 담고, 비강남을 위한 교육정책 등 가시적인 인적개발을 제시해야 했다. 보수세력과 반대언론들은 이 문제에 거품을 물고 빨려들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요즘 다시 ‘수구언론’이라며 조·중·동과 각을 세운다. 아직 끝난 싸움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대중을 사로잡았던 특권과 지역구도 폐지는 그것만으론 될 수 없는 것도 확실하다.
정의길/국제팀 기자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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