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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여성 지도자의 가슴 / 박용현

등록 2007-02-08 17:00

박용현/24시팀장
박용현/24시팀장
편집국에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뉴스에 나올 때면 그의 젖가슴을 한번씩 보게 된다. 어릴 적,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어둠처럼 찾아오면 서둘러 작은 머리통을 부비며 파고 들던 어머니의 따뜻한 젖가슴.

펠로시는 미국 대통령 승계 서열 2위의 자리에 오른 역사상 첫 여성이다. 동시에 다섯 자녀의 어머니요, 여섯 손자의 할머니다. 하지만 이국의 정치인을 보며 난데없이 어머니 젖가슴을 생각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위해 애써온 정치인이라는 말을 듣고서, ‘정치적 모성’이라고 이름할 무엇을 느꼈다고나 할까.

펠로시는 사회적 소수자인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에이즈 감염인의 주택·의료 복지를 확대하는 법안과 제도 마련에 힘썼고,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돕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법안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지역구는 미국에서 유권자 성향이 가장 좌파적인 곳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의 정책적 색채가 사회적 약자에 우호적일 것임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정치인이 중앙 정치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으니, 약자와 소수자들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유력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도 정치적 모성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는 어린이 법률 지원에 헌신해 온 변호사로서 1996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책을 썼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소외된 어린이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흑인동네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지적 계발에 도움이 될 환경을 만들어줬더니 지능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높아지더라는 연구 결과 등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아이들의 복지를 우선적 과제로 여기고 조건이 뒤처진 아이들은 더욱 챙겨줘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어린이를 위한 공산주의’라는 말까지 듣는다. 투표권도 없는 어린이들을 대변하려는 정치인의 진정어린 모습에서, 냉철한 이미지 너머로 푸근한 가슴이 느껴진다.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가난과 범죄에 찌든 미국 빈곤층 어린이들은 조금 더 밝아진 미래를 살게 되지 않을까.

요즘 미국에서 모성 정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두 사람의 미덕은 여성성의 고정관념인 부드러움만도 아니요, 그 고정관념의 부정인 강인함만도 아닌 것 같다. 바로 그 근저에 자리잡은 정치적 모성, 그 아름다운 진보성에서 이들의 정치적 힘을 찾고 싶다.

우리에게도 어머니 가슴을 지닌 여성 지도자들이 주류가 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장애인들이 “장애인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국회가 정치 현안을 이유로 심의에 늑장을 부린다”며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는 일만이라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가난의 대물림이니 새로운 계급사회니 하는 말들도 눅어들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소리 없이 우는 아이들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선 정치판 악다구니에 팔을 걷거나 독설의 칼날을 꼬나쥐고 있는 여성 정치인들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가장 앞서 최고의 자리로 달려가고 있는 박근혜 의원을 보자. 긴급조치 위반 사건 재판을 맡았던 판사 명단이 공개되자 자신에 대한 정치 공세라고 주장했다. 차라리 조용히 눈물 흘려 그 시대 인권 유린의 책임자인 아버지의 죄업까지 씻어내릴 수는 없었는지. 그 눈물로 억울하게 고초 겪은 숱한 이들의 상처를 닦아줄 수는 없었는지. 더 이상의 정치적 모성을 운운해 무엇하랴.


박용현/24시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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