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민족국제 편집장
편집국에서
지난달 31일 저녁 서울 성북동 일본 대사관저에 갔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관저 안은 후끈했다. 마치 대갓집 결혼식 같았다.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맨 앞에는 미야지마 아키오 주한 일본대사관 총무공사와 오시마 쇼타로 대사가 손님을 맞았다. 손님은 대략 150여명.
3년 반의 근무를 마치고 떠나는 미야지마 공사 송별회가 시작됐다. 오시마 대사는 “좌에서 우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여기에 온 분들의 얼굴만 봐도 미야지마 공사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짧게 인사했다. 행사장을 둘러봤다. 정치인·공무원·교수·언론인·사업가·사회단체 회원 등 알 만한 얼굴이 많았다. 이념적으로 진보에서 보수까지, 나이로 30대에서 80대까지 참석자의 폭이 컸다. 참석자들도 그 다양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밤낮 없이 학술모임·세미나·심포지엄·토론회·대학 강의·밥집·노래방 등을 누비며 길어 올린 한국 친구들이다.
김영작 국민대 명예교수가 참석자를 대신해 송별사를 했다. 김 교수는 1천년이 넘는 한-일 관계를 돌아볼 때 사명대사(1544~1610)와 아마노모리 호슈(1668~1755)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두 분은 임진왜란을 거치고 한-일 관계를 우정의 반석에 올렸놨습니다. 두 분의 용기와 지혜를 깊이 되새기는 게 중요합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을 모집해 싸우고, 전쟁 뒤인 1604년 선조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쓰시마의 유학자인 아마노모리 호슈는 대조선 외교를 담당하면서, 성의와 신의를 강조하는 ‘성신외교’를 펼쳤다. 두 사람을 거론한 것은 미야지마 공사의 얘기를 꺼내려는 몸풀기였다. “사실 한-일 무비자 시대의 도래는 일반인들에게 획기적인 일입니다. 총무 담당인 미야지마 공사는 무비자가 되면 자신의 권한 95% 정도가 없어지는데도 즐거움과 믿음으로 실무를 도맡아 하며 이를 해냈습니다. 더구나 한-일 관계가 아주 어려운 시기에 말입니다.”
미야지마 공사가 서툰 한국말로 답사를 했다. “제 마음은 ‘정이 들자 이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지만 여러분 덕분에 나에게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됐습니다. … 여러분 정말 감사 … (흑흑).” 그가 마지막에 눈물로 말을 잇지 못하자, 격려 박수가 터져나왔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득실대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는 게 세태라던가. 하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는 마당인데도 많은 한국 친구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았다.
외무성 대양주과장, 북미과장이란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유엔대표부 특명전권 공사가 돼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유엔에 가면 반기문 사무총장, 한국대표부 직원들과 김치·설렁탕을 먹으며 코리안 커넥션을 중시하면서 일을 하겠다. 저도 평생 한국을 가슴속에 담을 테니 여려분의 가슴에 미야지마와 일본을 담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외교무대는 총만 들지 않았을 뿐, 각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 그러기에 한국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본 외교관이 한 사람 더 생긴 것은(일본으로서도 그이 덕분에 많은 한국 친구가 생긴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봤다. “지금 ‘한국의 미야지마’들도 일본, 아니 세계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을 거야. 다만 멀리 있어 우리가 볼 수 없을 뿐이지.”
오태규/민족국제 편집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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