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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사교육 ‘괴담’ / 김영희

등록 2007-03-15 18:41

김영희 /편집3팀 기자
김영희 /편집3팀 기자
편집국에서
두 아이가 제 손으로 자물쇠 따고 집에 들어갈 나이만 되면 육아 고민은 어느 정도 덜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생후 6개월부터 놀이방에 맡겼던 탓인지 아이가 어떤 낯선 곳에 가도 쉽게 부모와 떨어져 가슴이 아릴 때도, ‘조금만 더…’ 하며 버텼다. 이제 아이들은 2학년, 5학년이 됐고 조부모들도 함께 또는 근처에 사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한 단계를 통과하고 난 다음 맞은 단계는 더욱 고난도다. 대한민국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분노’하고 ‘통탄’하면서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그 괴물은 ‘사교육’이다.

#1. 강남에 사는 친구가 알려준 이야기: 가끔 놀이터에 나와 있는 초등생들은 어김없이 휴대폰을 갖고 있는데 이쪽저쪽에서 음악이 울린다. 하루에도 몇차례나 되는 학원 가기를 기억하도록 휴대폰엔 시간대별로 다른 음악의 알람이 저장돼 있다.

#2. 회사 후배가 초등 2학년 아이를 데리고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휴가 조정이 힘들어 학기 중 열흘을 쉰 셈이 됐는데, 같은 반 아이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 영어는 기본 아니냐. 교육에 관심이 많은 것 같고 돈도 있는 것 같으니 제2외국어로 독어나 스페인어 과외를 하자”는 것이었다.

#3. 친척 조카는 올해 수도권 어느 과학고에 들어갔다. 기숙사 식인 이곳에서 2주에 단 한번 나오지만 그 토요일에도 조카는 바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버스에 실려 대치동 학원으로 향한다.

이런 풍경을 ‘엽기적’이라며 웃어넘긴다면 당신은 분명 강심장이거나 뚜렷한 교육철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맞벌이 부모, 특히 엄마들에겐 이건 섬뜩한 ‘괴담’이다. 방과후 시간을 아이들 자율에 온전히 맡기기엔 불안하고, ‘조사해 봅시다’ ‘생각해 봅시다’ 식의 학교 숙제도 어른의 도움이 없으면 끝내기 어렵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간부는 초등 2학년 딸의 스케줄이 밤 9시30분에나 끝난다며 일하는 아내의 극성에 불만스러워했지만 그 엄마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대개 남편들은 ‘인심 좋은 부모’ 쪽이다. 엄마가 아이들을 관리하는 ‘매니저’이자 ‘공부 선생’ 노릇까지 하는 이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불안심리는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 되기도 한다.

어느 언론계 선배가 아이를 ‘최상위 그룹’ 과외에 넣기 위해 나갔던 모임은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권력관계’ 분명했던 의사 부인 모임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여기선 전교 1등 엄마가 ‘상석’에 앉는다.) 그 그룹의 과외선생을 동창으로 둔 덕에 합류에 ‘성공’했지만, 학원 정보나 학년별 공부 매뉴얼 등 엄마 모임들의 ‘노하우’에 목말라 하는 일하는 여성들에겐 흔한 사례가 아니다. 입시설명회 사진을 보며 “나도 나중엔 이렇게 해야 하나?” 했더니, 한 선배는 “그것도 평소에 쭉 정보를 모아온 사람들이나 들어야 알지 고3 때 한두 번 가면 뭔 소리인지도 몰라” 한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삼백몇십 가지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괴물 같은 사교육 시장 속에서 ‘무책임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는 일하는 엄마들의 사교육 의존도는 점점 높아만 간다. ‘애도 재미있어 하고 나중에 아이가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말이다. 이 경쟁을 끝까지 외면할 신념도 없는 나 또한 여전히 고민 중이다. 하지만 영어 하나, 피아노 하나 시키다 보니 이러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20·30대 기혼 직장인 60%가 맞벌이라는 시대. 경제적 형편이나, 부모의 ‘상식’이나, 아이의 능력과 체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사교육의 ‘황금비율’이 절실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김영희 /편집3팀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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