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24시팀장
편집국에서
무섭지 않았나요, 그 고통이. 세숫물이 조금만 뜨거워도 화들짝 놀라고 마는 우리 몸이 그 타는 불길 속에서 얼마나 끔찍하게 아우성칠 것인지.
혹시 당신은 그를 생각했나요. 1990년대 서울 봉천동 철거촌에 살 때 보았다던, 철거민들을 돕던 그 젊은 여성 활동가 말입니다. 그가 철거반원들에게 무참히 얻어맞던 날, 당신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죠. 그래서 두고두고 부끄럽다죠. 그는 얼마나 아팠을지 새삼 생각한 건가요. 그처럼 남을 위해 한번은 육신의 고통쯤 견뎌보겠노라고 결심한 건가요.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고 유서에 쓰면서.
두렵지 않던가요,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이. 비록 처자식은 없다고 해도, 8명 형제와 조카들이 눈에 밟히지 않던가요. 당신이 활동하던 시민단체의 정겨운 회원들은 어떤가요. 숱한 집회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동지들은 또 어떤가요.
“나는 이 나라의 민중을 구한다는 생각이다”라고 유서에 썼지요. 그런데 그 일을 왜 하필 당신이 해야 하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몰지각한 인간들이 당신의 희생을 깎아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하기야, 당신은 누구를 미워해서 그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그 반대겠지요. 그러니 당신은 저 천박한 인간들도 이미 용서하고 남았겠지요.
그래도 무섭지 않던가요, 저 칠흑같은 죽음 너머가? 당신이 쓰러진 남산 자락엔 겨울 지나면 어김없이 벚꽃 흐드러지고, 그런 길에 설 때마다 뿌리칠 수 없이 충전되는 삶이라는 중독물질. 그보다 더 절실한 무엇이 있었나요. 1970년 전태일로 하여금 몸을 사르게 한 그 무엇, 1986년 김세진·이재호로 하여금 몸을 사르게 한 그 무엇?
그때와 지금이 같으냐고 말하기도 하지요. 민주화가 됐는데,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느냐고 꾸짖기도 하지요. 그러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는 꾸준히 금지했지요. 반대 광고도 막았지요. 집회를 강행하면, 교통체증만 떠들어댔지요.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묻혔지요. 누가 몸이라도 살라야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이냐? 사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두렵지 않았나요, 당신이 몸을 버려도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12시간씩 뼈빠지게 일하는 택시기사 당신이 꿈꾸는 그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는 어쩌면 너무 먼 꿈인지도 모르지요. 농민이든 노동자든 힘없는 이들은 늘 지면서 전진하고, 배반당하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겠지요.
바로 그렇기에 가시면 안 됩니다.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우리들은 지금 한 치든 한 푼이든 다만 전진하기만 하면 된다 … 우리들은 길이 멀어 도달하지 못함을 깨닫고도 ‘죽은 후에야 그만둘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는 곧 공자의 ‘그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이를 하는’(知其不可而爲之者) 것이 된다. 바로 그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이기에 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활에는 춘의(봄의 마음)가 깃들게 된다.”
당신에겐 아직 할일이 많습니다. 다시는 죽음을 뛰어넘을 생각은 마십시오. 그저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아득바득 살고자 하는 인간으로, 내 몸의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작은 걸음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치든 한푼이든 나아가는 겁니다. 허세욱씨, 사경을 헤매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쏟아냈군요. 부디 쾌유해 이 모든 질문에 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박용현/24시팀장piao@hani.co.kr
당신에겐 아직 할일이 많습니다. 다시는 죽음을 뛰어넘을 생각은 마십시오. 그저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아득바득 살고자 하는 인간으로, 내 몸의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작은 걸음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치든 한푼이든 나아가는 겁니다. 허세욱씨, 사경을 헤매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쏟아냈군요. 부디 쾌유해 이 모든 질문에 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박용현/24시팀장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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