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훈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에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2·13 합의의 초기조처 이행 60일 시한을 넘기면서 워싱턴엔 역풍 조짐이 확연하다. 아직은 아니지만 토네이도로 바뀌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재량권의 한계를 넘나들며 의욕적으로 대북협상에 나섰던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는 한·중·일을 방문하고 지난 16일 귀국한 이래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언론 친화적인 힐 차관보가 그만큼 구석에 몰려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1월 초까지만 해도 힐 차관보는 재무부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조사에 대해 “법 집행 차원”이라며 국무부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되뇌었다. 그런 그가 베를린 회동을 계기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까지 받아내 동결자금 해제에 반발하는 재무부를 설득하는 엄청난 반전을 이뤄냈다. 재무부는 끝까지 합법 자금만 풀어주겠다고 우겼다. 그는 문제의 싹이 될 불법 자금까지를 포함해 모두 털어내면 북한이 합의 이행에 나설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 힐 차관보의 말은 공중에 뜨고 말았다.
힐 차관보는 “내 손에 돈이 들어오면”이라는 김계관 부상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은 셈이다. 그러나 북한은 베를린 합의 당시 동결자금 반환 약속을 금융제재 해제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6자 회담 참석자들 말로, 북한의 요구는 2500만달러 가운데 일부 합법 자금만이라도 돌려달라는 데서, 모든 자금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기술적이고 절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했던 비디에이 문제는 어느새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른 합의 이행에 앞선 선결조건이라는 근본적 문제로 커져 버렸다. 자신들의 국제적 신용까지 미국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불법 활동이라며 단속하고 조사한 것 자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이전으로 모두 돌려놓으라는, 사실상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행이 송금을 거부한 것을 미국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점을 북한은 알아야 한다.
힐 차관보의 협상태도가 못마땅했던 비판 진영은 호기를 맞았다. “북한이 골문을 계속 옮기고 있다” “모든 자금을 풀어준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비판에서부터 “2·13 합의 자체를 파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대북 유화태도에 반발해 사임했던 로버트 조지프 전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은 24일 미국기업연구소(AEI) 주최 북한 인권주간 행사 강연에서 “가장 위험한 확산 국가인 북한을 제어하려면” 압박이 최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일 정상회담도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킬 것이다. 일본을 가장 잘 안다는 마이클 그린 전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은 “아베 총리의 대북 압박 설득에 부시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6자 회담에서 소외됐던 일본에 2·13 합의 이행 지연은 대북 압박에서 미-일 공조를 회복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럴수록 힐 차관보 등 대북 협상파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 소식통은 “1~2주일 안에 북한의 움직임이 없을 땐 상당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북한의 최근 태도는 6자 회담을 지연하고, 북한이 겪어본 최고의 협상 상대를 거세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워싱턴 강경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워싱턴의 봄날씨를 보면 4월에도 눈과 우박이 내리고 강풍이 불다가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따뜻해진다. 변덕스런 봄날씨처럼 적응하기 힘든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류재훈 /워싱턴 특파원 hoonie@hani.co.kr
워싱턴의 봄날씨를 보면 4월에도 눈과 우박이 내리고 강풍이 불다가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따뜻해진다. 변덕스런 봄날씨처럼 적응하기 힘든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류재훈 /워싱턴 특파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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