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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조승희씨와 한국의 인종주의 / 정의길

등록 2007-05-01 18:12

정의길/민족국제부문 편집장
정의길/민족국제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터지고 범인이 조승희씨란 사실이 아직 드러나기 전 한국 신문 등 언론들은 처음에 ‘미국 최악의 학원 총기난사 사건’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조씨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미국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은 한국계’ ‘한국 교포 1.5세대가 범인’이라는 제목으로 1면을 도배했다.

<한겨레>의 경우 초판 신문에는 ‘미국, 제 가슴 쐈다’로 1면 제목을 뽑았다. 그러나 조씨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미국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은 한국계’란 제목으로 바꿨다. 당연한 일이다. 대형 사건의 범인이 밝혀진 이상 그 범인의 신상이 보도의 초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목이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고 볼 때 과연 어떤 제목이 더 타당할 것인가는 논란거리가 아닐 수 없다. 조씨가 한국계라는 사실이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조승희란 개인, 현대 사회의 소외 그리고 미국이라는 특수한 사회가 낳은 구조적 문제가 겹쳐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내내 이 사건을 ‘한국계 조씨’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기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당연한 반응이고, 잘못된 반응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반응 속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모순된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 주류 언론들이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 개인의 문제이지, 한국계나 소수민족의 문제가 아니라고 평한 보도들을 우리 언론들은 허겁지겁 받아썼다. 한국 정부는 조씨가 법적으론 한국 시민권자이지만 사실상 미국 영주권을 가진 미국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대통령의 육성 사과 등까지도 고려하는 착종된 반응을 보였다. 화해와 애도, 치유를 그 어느 사건보다도 애타게 강조했다. 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도 추모회와 애도집회를 앞다투어 열었다.

한국은 조씨 사건과 관련해 미국 사회에서 부정적 반응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거의 공포감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가 30일간 금식기도까지 제안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내 소수민족으로 있는 동포들에 대한 걱정에서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우리의 우려와 염려를 왜 우리 사회 안에는 적용시키지 못하냐는 것이다. 지난 2월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사건 때 한국의 종교계는 그곳에서 숨진 외국인들을 위해 그런 추모회와 애도집회를 열었는가? 개인 문제로 일어났다고 애써 강조하는 이역만리의 사건에는 그런 추모와 애도를 쏟아부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일어난 발등의 사건에는 왜 그런 추모와 애도가 없었는가? 한국계에 쏟아질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는 두려워하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우리 자신들이 저지르는 인종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조승희씨 사건에 대해 미국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성숙한 대응을 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조씨 사건에 어쩔 줄 몰라하는 한국의 태도에 대해 과민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란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라고 평했다. 조씨의 추모석까지 세운 버지니아공대의 추모 분위기에 한국 사회는 감읍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우리 사회 안의 인종주의를 교정하는 계기가 될지는 불투명하다.


요즘 농촌 총각 넷 중 한 명은 외국계 신부와 결혼할 정도로 한국 사회도 이제 다인종 사회로 변하고 있다. 10~20년 뒤 이들 외국계 신부들이 낳은 2세들은 성인이 된다. 그들이 소외되고 한국 사회에 융화되지 못한다면, 한국은 제2의 조승희를 우리 안에 배태할지도 모른다.

정의길/민족국제부문 편집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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