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민족국제 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우리 국민 21명이 탈레반한테 인질로 붙잡혀 있습니다. 벌써 두 사람의 존귀한 목숨이 희생됐습니다. 인질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이번 사태가 알려진 지난달 20일부터 피랍자 가족들은 물론, <한겨레>의 많은 기자들도 새벽까지 탈레반의 움직임을 살피느라 밤샘을 하고 있습니다. 노심초사하기는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500만이 아프간 인질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입니다.
이번 사태는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한국이 꼼짝없이 인질 신세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고자 이라크와 아프간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파병은 이번 사태를 불러온 중요한 요인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이번 사태 해결에 냉담하기만 합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요구하는 ‘인질과 수감자’의 맞교환은 ‘테러단체한테 양보란 없다’는 국제적 규범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펄쩍 뛰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그들이 강고한 원칙만을 강조할 뿐 인질문제를 해결할 ‘창조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1일치 3면 ‘총구 앞 21명의 목숨 … 해법 열쇠 쥔 미국에 달렸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겨레 편집위원들은 이 기사를 내보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을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사태 해결에 방해가 되고, 납치범들의 협상력만 키워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한겨레에서 이 기사를 쓰기로 결정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고는 인질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한국 정부가 미국에 대놓고 ‘미국이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인질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달라’고 촉구하기는 외교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아프간 정부가 미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는 정부이긴 하지만 독립정부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론마저 엄연한 미국의 책임·역할론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여론이 미국의 협조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이 기사를 즈음해 한국과 미국에서 미국 역할론에 대한 여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 역할론을 반미 부추기기로 몰아가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한심한 움직임입니다. 인질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인지 미국을 보호하자는 것인지 헷갈릴 뿐입니다. 4일치 3면 ‘무고한 생명 살리자는데 반미 몰아세우다니 …’라는 기사는 이런 기막힌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머리 숙여야 할 일도 많습니다. 아프간 현지와 4시간30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인질 2명이 살해된 중대한 사실을 일부 지방 독자들에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8명 석방설은 외신만 믿고 보도했다가 밤새 상황이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습니다.
인질 사건 보도는 많은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납치범들의 요구조건, 인질의 인터뷰, 이쪽의 협상 상황을 보도하는 것 자체가 납치범들의 심리전에 말려들거나 그들의 협상력만 키워줄 수 있습니다. 2004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프리랜서 사진기자 납치사건 때는 20여 외국 언론사들은 이 사건 자체를 보도하지 말자는 협정을 맺어, 사건의 단기간 해결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한국 언론들은 현지 취재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아주 민감한 사안에서 극히 제한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있을 때 선정적인 보도는 금기입니다. 한겨레는 생명과 속보가 충돌하는 이런 사건의 보도에서 ‘선정성 금기’를 원칙으로 최대한 신중한 보도를 하고자 합니다.
정의길/민족국제 부문 편집장 Egil@hani.co.kr
정의길/민족국제 부문 편집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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