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남구 논설위원
마술사들은 자신의 손기술을 감추기 위해 관객들의 눈길을 엉뚱한 곳으로 쏠리게 한다. 관객들은 무언가 속고 있다고 짐작은 하지만, 뭘 속은 것인지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간다. 요즘 우리 경제관료들도 마술사한테 제대로 한 수 배운 듯하다. 내수침체의 원인을 “가계가 지갑을 닫은 때문”으로 돌림으로써, 정책 실패의 책임을 벗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올 들어 소비심리 지표는 뚜렷이 좋아지고 있다. 이제 내수회복을 기대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그동안 가계가 정말 지갑을 닫고 있었던 것일까? 민간소비가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2003년 2분기부터다. 지난해 4분기에야 소폭 증가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 사이 가계가 지갑을 닫았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가처분소득 가운데 소비에 쓴 돈의 비율을 평균소비성향이라고 한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평균소비성향은 2001~02년 평균 74.5%에서 2003~04년 74.8%로 오히려 조금 높아졌다.
국민소득 통계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가계) 저축률은 신용카드 소비가 급증했던 2001~02년 국내총생산의 6.25%에서 2003~04년 6.5%로 약간 높아졌을 뿐이다. 그 정도로는 소비침체의 원인을 가계의 소비심리 위축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 더욱이 개인 저축률은 2000년 10.6%였고, 그 전에는 훨씬 더 높았다. 긴 흐름에서 보면, 가계는 최근 몇 해 돈을 너무 펑펑 썼다고 해야 할 정도다.
경제관료들이 국민의 눈길을 ‘소비심리 위축’으로 자꾸 쏠리게 하면서, 감추고 싶어하는 것은 ‘늘어나지 않는 가계소득’이다. 한국은행의 국민소득 통계를 분석해 봤더니, 지난해 실질 가계소득(노동자 임금과 자영업자들의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겨우 1.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세금과 사회 부담금을 감안한 가처분소득 증가율은 그보다 낮은 1.67%였다. 지난해만 그런 게 아니다. 가계소득은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1.73% 늘었을 뿐이다.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6%로 가계소득 증가율보다 훨씬 높았다. 가계는 지갑을 닫은 것이 아니라, 지갑이 얇아져 함부로 소비를 못할 형편이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라면, 가계소득이 경제성장률과 비슷하게 늘어야 한다. 그래야 민간소비도 그에 맞춰 늘면서 경제가 선순환한다. 외환위기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우리 경제는 성장률만큼 가계소득이 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에 빠져들었다. 이는 영세 자영업자의 실질소득이 최근 2년 동안 연평균 8.5%씩 줄어든 게 가장 큰 원인이다. 노동자 1인당 실질임금도 지난해 0.76% 증가에 머무는 등 옴짝달싹 않고 있다. 가계가 2001~02년 사이 빚을 내 소비를 크게 늘리고, 앞다퉈 집을 산 후유증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자 부담이 늘어 가계의 순이자소득은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줄어들었다. 액수는 18조원으로 1999년의 30조원과 견줘, 12조원이나 적다.
올 들어 내수회복 기미가 나타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복의 정도와 지속 기간이다. 가계의 소득증가율이 지금처럼 낮아서는 내수 회복세는 아주 미약할 수밖에 없다. 회복세가 강하다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말한 대로 ‘공짜 점심’은 없다. 무리하게 앞당겨 쓰면 훗날 그만큼 덜 써야 한다. 신용불량자 문제가 이미 그것을 보여준 바 있다.
가난한 가계와는 반대로, 지난해 기업부문 실질소득은 무려 28.6%나 늘어났다. 이를 보면, 경제관료들이 지금 진정 고민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어떻게 하면 기업부문으로만 쏠리는 돈을 가계로 돌릴 것이냐다. 가계더러 지갑을 열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는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경제문제는 ‘정부 명령’으로 풀 수 없지만, ‘마술’로는 더더욱 풀리지 않는다. 더구나 경제관료들이 부리는 마술은 아무 재미도 없지 않은가.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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