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외환위기 때 내가 기자들에게 ‘펀더멘털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이해를 구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됩니다. 요즘 외부 요인 때문에 물가가 많이 오르고 있는데, 정부가 할 수 없는 부분은 국민에게 솔직하게 협조를 구해 소비절약 운동을 펼치든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럴 만큼 위기상황은 아닙니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을 지냈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일 언론사 경제부장들과 한 간담회에서 ‘올해 물가와 경상수지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한 발언입니다.
그런데 불과 10여일 뒤, 국정 최고책임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전혀 다른 진단을 내놨습니다. 한마디로 ‘경제가 위기다’라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6일 새 정부 장·차관 워크숍에서 “지금 현재 부는 위기가 아마 오일쇼크 이후 최대 위기”라고 포문을 열더니, 바로 다음날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위기론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 <한겨레> 편집회의에서도 이 대통령의 경제위기론이 토론의 단골 메뉴였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대통령의 이런 인식이 ‘올해 6% 성장 목표’ 등 경제운용 기조를 바꾸겠다는 의미를 내포하느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청와대나 경제부처의 움직임에서 그런 낌새는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직자 기강 잡기용’, ‘7% 성장 공약의 실패에 대비한 핑곗거리 찾기’ 등 다양한 분석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취재한 결과를 보면, 대통령의 위기론이 엄밀한 상황분석에서 나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최고 국정책임자의 경제인식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막중합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도 있듯이, 대통령의 말만큼 경제심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는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의 발언 내용과 의미를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자칫 대통령의 발언이 치솟는 환율에 기름을 붓고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비판도 곁들였습니다. 경제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섣부른 ‘오럴 해저드’(oral hazard)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언론이 위기론을 들고 나오면 정부가 “위기설만 있고 위기는 없다”고 불을 끄는 게 순서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경제현안과 관련해 가장 예의 주시하는 것은 정부의 경제정책 운용 방향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7·4·7’ 공약과 관련해, 저희는 처음부터 ‘성장 지상주의’ ‘시장 만능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새 정부의 경제팀은 물가안정과 위기관리를 말하면서도 성장과 경기확장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듯 보입니다. 강만수 장관은 지난 21일 “통화관리로는 물가를 잡는 데 한계가 있다”며 통화정책 결정권을 가진 한국은행을 넌지시 압박했습니다.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인상에 반대한다는 뜻이지요. 새 정부 출범 뒤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환율에 대해서도, 수출기업들의 경쟁력 확보와 성장률 제고를 위해 나쁘지 않다는 속내를 여러 차례 드러냈습니다. 이런 경제운용은 서민들에게 곧바로 주름살을 안길 게 뻔합니다.
강 장관의 호는 청설(聽雪)입니다.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귀가 밝고 열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강 장관에게는 좀더 냉철한 현실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보청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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