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김선주칼럼
“쿠바는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하는 독이다.” 화가 사석원은 쿠바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여행기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쿠바에서 음악은 흐르는 강물 같았고, 그렇게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 것은 빔 벤더스 감독이다. 그렇게 해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아바나를 떠나는 날, 바다가 바라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쿠바 맥주 부카네로(엄청 맛있다)를 마시며 나는 벌써 언제 이 나라를 다시 올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쿠바는 온몸으로 황홀하게 퍼지는 독과 같았고 음악은 강물처럼, 아니 피가 되어 온몸을 구석구석 돌았다. 기온은 섭씨 24도, 바닷바람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을 부드럽게 흔들었고, 벼룩시장이 열린 광장에는 집집마다 들고 나온 고서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을 불러 세웠다. 세르반테스도 <라이프> 잡지도 마르케스도 네루다도 있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쿠바혁명 직후인 1960년에 이런 기사를 썼다. “…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얼굴이자 목소리이며 정신이다. 라울은 혁명을 위해 뽑은 단검이다. 게바라는 두뇌에 해당한다. 그는 이 세 명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달콤하면서도 우수에 젖은 미소를 지니고 있다 ….” 6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게바라에 심취했던 친구들과 40년을 벼르고 별러서 한 쿠바 여행에서 우수에 젖은 게바라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재정의 60%를 관광산업에 의존하고 있는 쿠바에서 최고의 관광상품은 게바라였다. 게바라는 젊어서 죽어 신화가 되었고, 피델은 늙고 병들었고, 라울은 몇 달 전 형한테서 정권을 물려받았다.
미국의 코앞에서 50년에 걸친 경제봉쇄와 언론과 자본의 무차별 공세를 이겨내고 민족을 지키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카리스마를 갖춘 카스트로가 꼭 필요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혁명 직후 쿠바 국민 모두를 무지와 질병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그의 다짐은 성공했다. 문맹률을 영으로 만들었고,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 낮추었고, 평균수명은 78살이 되었다.
그러나 쿠바 국민들은 더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카스트로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을 보이면서도 카스트로가 절반의 성공을 했을 뿐이며 이제 라울이 나머지를 채워주는 정책을 펼 것이라고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다. 쿠바는 그들의 가난을 그들의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처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줄지어 늘어선 관광버스들은 모두가 중국제였다. 전국시대 이래 중국의 대외정책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티베트 국민의 독립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먼나라 쿠바에는 공을 들이는 중국, 쿠바를 옥죄며 친미 정권 수립 계획을 노골적으로 세우고 있는 미국, 거대한 나라 옆에 붙어 있는 한반도와 쿠바는 비슷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쿠바 여행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쿠바에 가려면 스무 시간을 비행해야 하고 비행기를 두 번은 갈아타야 한다. 해마다 한국 관광객이 2천명 이상 이곳을 다녀간다. 코트라 아바나사무소도 문을 열었다. 거리에선 한국산 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호텔 냉장고엔 대우 상표가 붙어 있다.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호의를 보이는 쿠바는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더는 우리에게 먼 곳이 아니었다. 가난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쿠바는 정말 황홀한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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