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지난주 대구 초등학생 집단 성폭력 사건이 <한겨레> 지면을 통해 처음 알려지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에 연루된 학생이 100여명에 이르는데다, 어린이들이 성폭력을 마치 놀이처럼 일상화하고 있었다는 점, 교육당국이 사건을 파악하고도 쉬쉬하며 숨기기에 급급했다는 점 등, 어느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내용이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여기저기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자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겠습니까.
<한겨레> 편집회의는 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자마자, 1면 머릿기사감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다만, 사안의 성격상 선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원인과 대책, 문제점을 부각해 기사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이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이런 기준에 따라 학교 이름이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은 모두 뺐습니다. 또 성폭력의 구체적인 묘사도 자제했습니다. 뒤늦게 사건을 보도한 다른 일부 신문들을 보니, 동성간 성행위 등 선정적인 표현이 눈에 띄더군요. 저희는 그런 대목에서 확실히 조심스럽고 차별적인 보도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독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일치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놀라면서 “철저한 대책을 세우라”고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한 학부모는 “그 아이들이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으니 학교 이름을 좀 알려 달라”는 전화를 해오기도 했습니다. ‘내 아이만 안전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가 우려하던 일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어린이 성폭력 사건의 원인으로 여러 차례 지적된 인터넷이나 유선방송에서의 음란물 범람이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학교 교실, 피시방, 가정 어디서나 어린이들이 갖가지 음란물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게 현실입니다. 따라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들 바로 옆에 안전장치 없는 폭탄을 놓아두고서 아무런 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요.
책임회피에 급급해 피해를 키운 학교와 교육당국의 고질병도 다시 확인됐습니다. 저희는 이 부분에도 주목했습니다. 대구시교육청 부교육감이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과했습니다만, 허리의 각도가 사건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겠습니까? 5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한 번만이라도 교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피해가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육과학기술부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리고 있는 듯합니다. 0교시 수업 허용 등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는 ‘학교 자율화’ 추진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이라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성적과 입시에 대한 중압감은 학생들을 음습한 곳으로 내몰기 십상입니다. 정치권에서도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교육청과 학교를 시찰하고 보고를 받는 등 부산을 떨고 있지만,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들이 한때 소란을 피우다가 시간이 흐르면 이번 사건도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위해 진정 할 일을 다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입니다.
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kimhj@hani.co.kr
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kimh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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