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동북아 균형자론’을 놓고 지난 몇 주 동안 많은 토론회와 좌담, 학술모임, 국회 질의응답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이렇게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토론이 벌어진 사례는 찾기 어렵다. 10여년 전의 북방정책이나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도 큰 변화였으나 토론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진전됐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토론을 통해 균형자론의 개념이 좀더 분명하게 다듬어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앞으로 더 진화할 수 있는 잠재력도 보여줬다. 반면, 비판적인 의견들은 내용이 별로 진전되지 못한 채 우려 수준에 머문 느낌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균형자론 쪽의 판정승이다.
정부에서는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문정인 위원장,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등이 전면에 나섰다.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밝힌 균형자 역할의 목표는 ‘조화로운 발전과 화해’를 통해 ‘평화롭고 번영하는 동북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전적 고민이 재연되지 않도록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 잠재적 갈등과 대립 요소를 협력적이고 조화롭게 바꿔야 하는 것이다. 동북아 시대에 걸맞은 목표다.
이런 목표는 자연스럽게 균형자 역할의 성격과 방법론을 규정한다. 곧, 균형자 역할은 패권적 이득을 챙기기 위한 세력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화해·상생·공생·협력을 구축할 수 있는 일련의 원칙과 규칙을 만드는 데 한국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세력 균형론에 따른 접근보다는 이른바 ‘자유주의적인 처방’이 더 큰 셈이다. 물론 의제를 설정해서 끌고갈 수 있는 정도의 국력은 우리에게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귀에 익은 세력 균형론을 바탕으로 ‘한국이 그 정도의 힘이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르는 격이다. 많은 비판이 공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균형자 역할과 상당 부분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기존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에 대해 정부가 얼버무리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한-미 동맹을 축으로 동북아의 전략적 안정성과 균형성이 보장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균형자 역할”이라는 설명은 모순이다. 주한미군을 지역 기동군화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서 보듯이 한국과 미국 두 나라가 추구하는 동북아 전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우방임을 인정한다면 한-미 동맹의 큰틀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도 지금은 유효하다. 여기에는 미국이 우리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노무현 정부 쪽의 기대도 깔려 있는 듯하다.
균형자라는 용어를 ‘안정자’로 바꾸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면서 균형자라는 말을 써 논란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정부가 밝힌 균형자 역할의 목표와 성격은 안정자에 꼭 들어맞는다. 이제까지 사용해온 ‘균형적 실용외교’와 균형자를 연결시키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외교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균형자 역할은 아니다.
균형자론은 이제 생존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개념적인 틀을 확립한 데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나가지 않으면 더는 진화하기 어렵다.
균형자에는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는 ‘소극적 균형자’와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열고 새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적극적 균형자’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힘을 더 기울여야 할 것은 뒤쪽이다. 균형자 역할의 시험대가 될 수 있는 사안도 눈앞에 있다. 바로 북한 핵 문제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균형자 역할은 한반도에서 평화구조를 만들고 민족적 역량을 극대화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북한 핵 문제는 그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처럼 북한과 미국이 강경하게 대립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구도에서, 한국이 한쪽으로 비켜선 채 말로만 균형자 노릇을 외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북특사 파견을 포함해 모든 실천적인 해결책을 검토해야 할 때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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