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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농자천하지대봉’ / 김학준

등록 2008-10-19 22:13

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
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이 쌀 소득 보전 직불금을 부당하게 신청했다는 의혹 제기로 시작된 쌀 직불금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습니다. 공무원과 공기업 임직원 4만6천여명이 부당하게 직불금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2006년 감사원 감사 결과가 나오고, 일부 국회의원과 고위공무원의 사례가 추가로 드러나면서 민심이 들끓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따라 농업부문의 수입 개방 폭이 커지고 커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농업은 위축될 대로 위축돼 왔습니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비료·농약값 등의 폭등으로 생산비는 대폭 늘었는데 벼 수맷값은 찔끔 오르는 데 그쳐 농민의 마음은 춥기만 합니다.

직불금 부당 수령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는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고 불을 지르거나, 서울 도심 등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당 직불금을 환수해 실경작자인 농민에게 돌려주고, 고위공무원과 정치인의 명단을 공개하고 처벌하라”고 요구합니다. 벼수맷값과 직불금 인상 투쟁이 시작되려던 차에 터져나온 부당 수령 문제는 올 가을과 겨울 농민투쟁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라고 충남의 한 농민단체 간부가 말했습니다.

직불금 제도는 농민에게 높은 값에 사서 소비자에게 낮은 가격에 팔던 이중곡가제 폐지와 세계무역기구의 보조금 감축 조처 등에 따라 도입됐습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쌀 수입 개방에 따른 농민의 소득 손실을 보전해 주려는 것입니다. 땅을 소유한 지주나 투기꾼에게 이익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일부 투기꾼의 양도세 탈세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투기로 농지를 사놓은 사람들이 농사를 직접 짓지 않으면서도 쥐꼬리만한 쌀 직불금을 청구하는 것은, 농지를 매각할 때 발생할 양도차액에 대한 높은 세금을 회피하려는 목적이라고 합니다. 8년 동안 경작을 하면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는데, 직불금 수령 사실이 자경의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의 얘기로는 투기꾼들은 자신들이 꼭 챙기고 또 임대농민에게 돌려주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지만 정작 소작 농민의 공개적인 목소리는 듣기 어렵습니다. 이들이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면 농사마저 짓기 어렵다며 입을 꽉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의 태도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문제 해결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여당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해결 능력은 고사하고 의지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이 듭니다. 애초 직불금 부당 수령에 대한 감사를 벌였던 감사원은 명단을 삭제했다며 명단 공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제도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그동안 방치하고 있던 농림수산식품부는 문제가 되자 뚝딱 대책을 내놓긴 했으나 실효성이 의심스럽습니다. 공무원 조직을 관장하는 행정안전부는 조사기준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전 정권의 허물로 돌리려는 정치공세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봉’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존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당하기만 하는 농민의 현실을 빗댄 말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시에는 관리나 토호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고달픈 삶을 읊은 것이 많이 눈에 띕니다. 긴 세월이 흐르고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농민의 삶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건가요?


김학준 지역부문 편집장kimh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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