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독자칼럼] 만화그리기 대회도 엄마들의 경연장 / 황영미

등록 2008-11-02 22:03

[독자칼럼]
지난 10월19일 서울대공원에서 열렸던 ‘제10회 동물만화 그리기 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치부와 초등부를 대상으로 한다는 대회에 동물과 만화를 끔찍이 좋아하는 딸아이는 참가 신청을 한 뒤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대회 날을 기다렸다. 수상작품을 동물원 광장에 전시한다는데 자기 작품이 전시된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품으로는 누구와 무얼 할지, 어린아이답게 딸아이는 대회 날까지 김칫국부터 마시느라 내내 행복했다. 그러나 대회 당일 동물원 입구에 도착하면서 꿈은 깨졌다. 너른 광장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주최 쪽에서 나눠준 8절 도화지에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많은 경우 아이들의 엄마였다.

‘많은 경우’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엄마는 아이더러 “야! 너 그림 안 그려?” 하고 묻더니 애가 관심이 없자 직접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칠만은 아이에게 맡길 생각이었던지 밑그림이 완성되자 아이 엄마는 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역시 엄마가 대신 그림을 그려주고 있어 신나게 놀던 여러 아이들과 한창 재미있던 아이는 “엄마가 해”라며 이벤트가 열리는 광장 쪽으로 뛰어갔다. 딸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직접 자기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아이는 정말이지 드물었다. 만화를 완성한 엄마들은 “잘 그렸네”, “언제부터 구상해 온 거야?”, “이 집 애가 상 받겠네” 하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교육청 주최 그림그리기 대회에 참여했을 때, 주최 쪽에서 엄마들은 대회장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참가자에게는 휴대폰도 지참할 수 없게 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엄마들이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그림을 전송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비리와 편법이 체계화되고 일반화된 사회에 살면서 뭐 이런 일로 요란을 떠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뇌물로 의심되는 선거비를 받아 썼으면서 국감 전날 하필이면 혈당 수치가 올라가 주시는 교육감도 있는데, 심심해서 한번 건드려 봤든 아니면 경쟁에 찌든 아이한테 상장 하나라도 안겨주고파서 그랬든 아이 작품에 손을 댔던 엄마들을 비난할 생각도 물론 없다.

하지만 딸아이한테 이 사태를 설명하려니 캄캄했다. 걸리지만 않으면 편법을 써서라도 성공하라고,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고 말할 것인가? 원칙 따지고 공정성 따지다가는 엄마 아빠처럼 지질하게 살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줄 건가? 완성된 작품을 주최 쪽에 내면서 나는 힘없이 고자질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들 엄마들이 그리고 있더라는 내 말에 주최 쪽이라고 앉아 있던 직원들은 “그래요?” 하면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긴 직원들도 그 모습을 훤하고 보고 있었으니까. 이게 다다.

하지만 엄마로서 딸에게 뭔가를 설명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았다. 그래서 나는 이 사태를 고발하는 내용을 신문에 투고하기로 약속했다. 아무리 썩은 사회라도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서울대공원 쪽에 부탁하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이런 대회를 주최할 때 우리같이 어리어리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공고해주실 것.

‘대상-유치부 및 초등부’라고 한 다음 잊지 말고, ‘협동정신을 발휘해 엄마든 아빠든 대신 그려줘도 됨’이라고.

물론 딸아이는 수상에 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수상작 모두가 엄마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딸아이와 나는 1시간 남짓 만화를 그린 다음 그 자리를 떠났으니까. 많은 참가자 중 내가 본 풍경은 일부라고 믿고 싶다. 여전히.


황영미/경기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