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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되살아나는 ‘대미 엇박자’ 악몽 / 오태규

등록 2008-11-09 21:45

오태규 수석부국장
오태규 수석부국장
편집국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벼락’ 오바마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정부·여당 쪽의 반응을 보면 ‘오버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바마가 당선된 날, 이명박 대통령은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인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도 “둘 다 변화와 개혁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자가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누가 봐도 양국간 핵심 현안인 북한과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 대한 정책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도, 천연덕스럽게 ‘쌍둥이론’을 읊고 있습니다. 마치 선물상자에 전혀 다른 내용물이 들어 있는데도 같은 포장지로 쌌으니 ‘같은 제품’이라고 우기는 꼴입니다.

이런 ‘제논에 물대기’ 식 풀이보다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인식이 경박하긴 해도 한결 솔직해 보입니다. 그는 오바마의 당선으로 빚어진 상황을 ‘처변불경’(변화에 처해서 놀라지 말라는 뜻)이란 4자성어로 요약했습니다. “1980년대 초 대만에서는 길거리마다 처변불경이라는 말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때 중국이 유엔에도 들어오고 세계 주요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으니까 전부 대만하고 관계를 끊을 때다. 이런 외교적 위기 속에서도 ‘절대로 놀라지 말고 단결해서 나가자’ 해서, 그 뒤 대만이 국제적 고립에도 꾸준히 성장하고 지금도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놀라지 않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합니다.

오바마 등장과 함께 이명박 정부는 당장 두 가지 긴급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하나는 대북정책의 조정이고, 또 하나는 에프티에이 처리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정부의 태도는 안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쭉~’ 해 나가면 된다는 식입니다.

에프티에이는 찬성론자들 가운데에서도 상임위 정도까지만 진도를 나간 상태에서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며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속도조절론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미국 쪽에서 아예 수정 얘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국회 비준동의로 대못질을 해 놔야 한다는 방침을 정해 놨습니다. 대북문제는 이보다 더합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엇박자가 아니라 아주 딱 맞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호기를 부립니다. 나라 안팎의 대대수 전문가들이 대북정책의 충돌 가능성을 한결같이 우려하고 있는데도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외교관 중에 ‘미국 근무 전문가’는 있어도 ‘미국문제 전문가’는 없다는 항간의 말이 사실이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윗사람과 미국 말을 잘 받아 적는 ‘받아쓰기 전문가’는 있어도 문제를 풀어가는 ‘창조적 전략가’는 없다는 말에도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김영삼-빌 클린턴 1기’, ‘김대중-조지 부시 1기’, ‘노무현-조지 부시 2기’ 때 두 나라 간 대북정책의 엇박자로 빚어졌던 불협화를 재현하지 않으려면, 정확한 정세 판단과 기민한 대응이 어느때보다 요구되는 때입니다. 인맥이 있느니 없느니, 정상간 전화를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지엽말단적인 차원이 아니라,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부의 지금 태도를 보면, 그때 그 악몽이 되풀이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오태규 수석부국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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