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거직조저왕 / 정재권

등록 2008-11-16 20:28

정재권 문화부문 편집장
정재권 문화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며칠 전의 경험담이다. 밤에 택시를 타니,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헌법재판소 접촉’ 논란이 보도될 때, 50대로 보이는 택시기사가 불쑥 물었다.

“강만수란 사람 어떻게 생각해요?”

갑작스런 질문에 멈칫하자 그가 먼저 답을 내놓았다. “그 양반, 자격 미달이야. 헌재를 자기가 접촉했든 안 했든 상관없어. 장관으로서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혹시 헌재도 요리할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열 사람 중 아홉은 당장 그만두라고 그래.”

말문이 터지자 화살이 ‘인사권자’에게 옮겨졌다. “이명박 대통령도 문제야. 촛불 때 뭐라고 했어. 국민의 말을 듣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듣긴 뭘 들어. 강만수란 사람 저렇게 붙들고 있으니. 딱 2%만을 위한 정책, 2%만을 위한 사람을 쓰고 있으니 원….”

혀를 차던 그는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사자성어가 무엇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곤 “거직조왕”이라고 스스로 답했다.

<논어>에 나온다는데, 그의 설명이 충분치 않아 나중에 <논어>를 들여다봤다. ‘위정편’에서,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의 왕 애공(哀公)이 묻는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따릅니까?”

공자의 대답. “거직조저왕 즉민복(擧直錯諸枉, 則民服), 거왕조저직 즉민불복(擧枉錯諸直, 則民不服).”

도올 김용옥은 이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


“곧은 자를 들어 굽은 자 위에 놓으면 백성이 따르고, 굽은 자를 들어 곧은 자 위에 놓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곧은 나무를 굽은 나무 위에 쌓아놓으면 굽은 나무도 곧아진다는 목수들의 생활 지혜를 정치판에 은유한 것으로, 백성의 지지는 무엇보다 군왕의 사람 씀씀이에 달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대목에서 크게 놀랐다. 2500년 전의 공자 말씀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게 우선 놀라웠다. 이 땅의 ‘장삼이사’들이 그런 가르침의 절실함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하지만 정작 이 대통령은 이런 여론에 ‘모르쇠’다. 귀를 막고, 열에 아홉이 아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청와대에선 “국면 전환용 개각은 없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건 국면 전환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첫 단추를 당장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굽은 자’를 걷어내는 일이다.

종합부동산세 하나만 봐도, 강 장관은 곧지 못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8월 헌재에 “종부세법은 문제가 없다”는 의견서를 냈으나, 두 달 뒤엔 “종부세는 지속이 불가능하고 조세원칙과 맞지 않아 개편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다시 제출했다. 재정부는 “(8월엔) 장관과 충분히 협의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댔다.

헌법재판소는 최근 강 장관이 국회에서 말한 대로 ‘종부세 세대별 합산 과세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두고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들 강 장관은 할 말이 없는 처지다.

공자의 가르침이 생명력이 있는 건 책 속에 갇힌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도 ‘삼환’(계손씨, 숙손씨, 맹손씨)의 무리들이 득세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공자가 조국의 이런 현실을 암시했으나 애공은 제때 굽은 자들을 걷어내지 못했고, 결국은 이웃 나라를 떠도는 서글픈 운명을 맞았다.

이 대통령이 ‘거직조왕’의 교훈을 새겨보았으면 좋겠다. 진리는 낮은 곳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정재권 문화부문 편집장jj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