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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눈] ‘보수 프레임’에 갇히지 말아야 /이봉수

등록 2008-11-26 18:49수정 2009-05-28 17:12

‘세금폭탄’ 등 ‘왜곡된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지배담론
종부세 위헌 결정은 넘어야 할 또 하나 프레임일 뿐
헌재의 보수성과 인적 구성, 헌법 개정 … 정면으로 이슈화할 필요
시민편집인의 눈 /

많은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불리한 제도개편에도 순응하거나 때로는 그것을 환영하기까지 할까?

한 보수신문 보도를 보면, 서민들이 많이 사는 관악구 출신 김성식 의원은 “주민들이 ‘왜 TV만 켜면 종부세만 갖고 떠드느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세금 인하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지역구 민심을 전했다. 아주 건전한 반응 같지만 ‘종부세의 슬픈 운명’을 짐작하게 하는 모순된 민심을 읽을 수 있다. 서민들은 부자들에게 매기는 종부세를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종부세가 폐지되면 자신들의 세부담이 늘어나는데도 ….

현실과 인식 사이 이런 괴리는 상당 부분 지배그룹과 언론의 담론활동에 따라 생겨나고 확대된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언어의 왜곡이 대중으로 하여금 ‘왜곡된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 결과 그런 지배담론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준거로 ‘생활의식’ 속에 자연스레 자리잡는다.

‘세금폭탄’. 보수언론이 만들어낸 위력적인 담론이다. 종부세 부과 대상은 2% ‘강부자’에 불과한데도 서민들은 ‘세금폭탄’이 터지면 자신에게도 파편 정도는 튀지 않을까 걱정해 왔다. 실제로 종부세가 도입되면서 강남의 대형주택 값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소형주택 값도 약간 떨어졌다. 진보언론이 아무리 ‘세금폭탄’이 아니라고 말해도 ‘세금수류탄’ 정도는 된다고 인식한다.

상대방 주장에 반론을 펴려면 상대방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말한다. 상대방 프레임에 갇히기 때문이다. 종부세 위헌 결정이 내려진 뒤 <한겨레>를 포함한 진보매체들은 나름대로 비판적 논조를 폈지만, 어떤 때는 ‘보수 프레임’에 갇힌 측면이 없지 않았다.

종부세를 완화하면 부동산값이 치솟을 것이라는 주장은 지당한 반격이면서도 서민 독자층에 잘 먹혀들었을지 의문이다. 신문이라도 구독할 수 있는 서민들 역시 피해는 작지만 대개 자산 디플레를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해관계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그들을 대변했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종부세 완화가 당신의 유리지갑을 얼마나 털어가게 되는지 계산해 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수치까지 제시하며 부자들 세금은 뭘 얼마나 올리고 대신 서민들 세금은 뭘 얼마나 깎아주겠다는 것이 버락 오바마의 수법이었다. 켄 리빙스턴(전 런던시장), 그레그 다이크(전 BBC 사장) 등 대처 시대에 ‘미치광이 좌파’ 소리를 듣던 세력은 ‘문화전쟁’ 끝에 영국을 이끄는 주류가 됐다. 우리 ‘좌빨’은 온갖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아직 ‘증세냐, 감세냐’ 식의 총론적 담론활동에 머물러 있는 이가 많다.

헌재 결정 자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받아들여 작성한 기사도 적지 않았다. <한겨레> 등 진보매체들은 한때 국민 80%가 지지하고 국민의 대표가 정한 법을 9명의 재판관이 재단하는 것은 민주정에도 심각한 위해가 된다고 지적하면서도 헌재가 내놓은 프레임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헌법재판 제도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다수가 선출한 대표가 항상 기본권을 보호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때 헌재가 주로 보호해야 할 소수가 기득권 세력은 아닐 것이다. 혼인 여부에 따른 과세 형평성에만 주목해 더 큰 형평성을 간과한 헌재가 우리 헌법정신을 구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세 부담의 형평성을 무너뜨려 오히려 헌법적 가치를 해쳤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토지주택 문제가 이토록 심각해진 배후에 헌재의 보수적 결정들이 있다. 초창기 <한겨레>는 토지거래허가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와 같은 공개념적 법률들이 위헌심판에 부쳐졌을 때 보수적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고 신랄하게 비판한 역사가 있다. 토지거래허가제만이라도 가까스로 5 대 4 합헌 결정이 내려진 데는 <한겨레>가 ‘토지소유권에 대한 낡은 생각’을 질타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사실 우리 헌법에는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 적합 조항’도 있고, ‘국토의 균형개발·이용을 위한 제한·의무 조항’을 두는 등 공개념적 요소들이 도입돼 있다. 어떤 조항에 비중을 둘 것이냐의 문제는 헌재 재판관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헌재의 보수성과 인적 구성 문제는 정면으로 이슈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 헌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때 언론은 헌법에 위배되는 사안일지라도 의제설정을 하고 헌법 개정을 공론화할 책무가 있다. 우리 헌법 개정의 역사는 정치권의 필요에 따라 국가권력 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점철돼 왔기에 사회·경제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입헌군주제 영국에서 <가디언>이 ‘이 시대에 군주제가 필요한가’라는 화두를 처음 던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상당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프레임에 갇히면 진보는 나아갈 영역이 없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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