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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새해를 열며 / 김종구

등록 2009-01-04 22:05수정 2009-01-04 22:40

김종구 편집국장
김종구 편집국장
편집국에서
덕담으로 새해 벽두를 열기는 애초부터 그른 듯합니다. 새로운 시작치고는 앞뒤가 캄캄절벽인 마당에 신년 초부터 곳곳에서 들려오는 게 우울한 소식들뿐입니다. 세밑부터 전운이 감돌던 국회는 기어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좌익 척결의 다짐으로 무장한 공안당국의 서슬 퍼런 기세 아래 제야의 촛불은 무참히 꺼졌습니다. 지난 1년의 세월이 유난히 시끄럽고 요란스러웠는데, 올 한 해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새해 아침입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는 유감스럽게도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다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졸업’했다고 여겼던 과거의 악습과 구태들이 여전히 왕성하고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모습은 실로 경탄스러울 지경입니다. 칼자루를 쥐었다고 의기양양해진 사람들이 마음먹은 대로 칼을 휘두르겠다는데야 사실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치사함과 경박함입니다.

위정자의 말이 진정성과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 현실에서는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촛불행렬과 아침이슬’로 대표되는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말할 당시의 상황과 처한 처지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말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혀끝에서 시작해 비눗방울처럼 꺼집니다. 자신의 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데 대한 최소한의 해명 노력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목소리가 크고 경건할수록, 그 내용은 더욱 허망하고도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질펀한 말의 향연은 있지만 진실한 감동은 없습니다.

이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에서 애초 원문에 있다가 실제 연설에서는 사라진 대목이 있습니다. “북한은 더이상 우리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고 협력의 자세로 나와야 한다”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목을 뒤늦게 고친 이유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진정성이라는 말을 없앤 것은 잘한 결정입니다. 내부에서도 믿지 않는 ‘진정성’을 밖에 대고 믿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법 좋아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눈을 부라리고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입니다. 뿌리뽑고 척결하고 선제대응하고 발본색원해야 할 일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약속 한마디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양심선언한 연구원을 처벌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헌신짝처럼 버린 국책연구원 쪽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일언반구 설명이 없습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공안 문교’란 말을 들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교육관료들의 비정함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일제고사 때 아이들의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무더기로 파면·해임시키는 냉혹함 앞에 참된 의미의 교육은 얼어붙고 맙니다. 달라진 세태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해 아양과 충성을 다하는 부박함이 어찌 일부 부처, 몇몇 인물에 국한된 일이겠습니까.

진정성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저희는 언론도 자칫 똑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스스로 경계합니다. 지난 1년 신문을 만들면서 언제나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대목입니다. 우리의 비판이 혹시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닌지, 공적 대의에서 벗어나는 사사로운 감정의 결과물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자람이 있다면 더욱 옷깃을 여미고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늦은 새해 아침 인사를 올립니다.

김종구 편집국장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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