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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칼럼] 60년 늦은 첫 귀환 행사

등록 2009-02-24 19:35수정 2009-02-25 16:13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칼럼




이달 끝 무렵 한 서린 행사가 열린다.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돌’을 기념하는 모임이 있고, 다음날 경기 연천군 전곡 38선기념탑에서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다. 행사 주체는 ‘시베리아 삭풍회’고, 회원은 80대 중·후반의 노인들이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열리는 이 낯선 행사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태평양전쟁 말기 식민지 조선에서 징병 또는 강요된 학도지원병 형태로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가 일제 패망 때 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옛소련에 끌려갔던 사람들이다. 시베리아 등지에서 혹독한 추위, 굶주림, 강제사역을 견뎌낸 이들은 2년에서 4년에 이르는 억류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을 밟는다. 수천명의 억류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가 돌아온 것은 1948년 11월 말이다. 약 25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나홋카를 출발해 북쪽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취주악단이 나와 환영 분위기를 돋웠고, 억류자들은 흥남여고 강당에 수용돼 침구가 제공됐다.

북한 당국의 조사를 거친 뒤 이북 출신 1500여명과 만주(중국 동북삼성) 출신 500여명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남한 출신 500여명의 운명이었다. 남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돼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총격전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북한은 49년 2월 초 남쪽이 고향인 사람들을 철원 연천으로 옮긴 뒤 경계가 삼엄하니 출신 지역별로 한밤중에 38선을 넘어가라고 했다.

동래 기장 출신 박정의(85)씨가 전하는 당시의 상황은 어이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하다. 배재고보를 나와 징병 1기생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던 그는 야반에 38선을 넘어가려다 총소리가 들려 포기하고 다음날 아침 동료들과 함께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넜다. 논 끝자락에 서 있는 초소에 녹색코트를 입은 사람이 보이길래 38선이 어디냐고 물었다. 초소 근무자는 바로 총을 겨누며 ‘손들어!’ 하고 고함쳤다. 파주경찰서에서 나온 형사였다. 박정의씨는 꿈에 그리던 귀향 경위를 설명했지만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는 “소련군에 항복할 때도 손을 안 들어 봤고 이북에서도 손을 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들었지!” 하며 자조의 표정으로 회고했다.

일행은 파주경찰서로 전원 연행돼 유도장에 수용됐다. 종일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정좌로 앉았다가 차례로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남쪽에서의 첫날밤을 쌀가마니를 뒤집어 쓴 채 추위를 견디며 보낸 것은 그 뒤의 험난한 인생경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다시 인천 송현동의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돼 두 달 넘어 조사를 받고 마침내 풀려났지만, 온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적성국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요시찰 딱지가 붙어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38선 통과시점인 1949년 2월을 기준으로 삼아 ‘느닷없이’ 열리는 이번 행사에 우리 정부의 존재는 사실상 없다.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친일청산 문제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제기해 온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 참여가 없었다면 60년이나 미뤄진 모임조차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회도서관에서 3월2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관련자료 전시회는 방치된 현대사의 비극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02)969-0226.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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