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손석춘칼럼] 시흥-평택의 길

등록 2009-04-08 22:16수정 2018-05-11 16:36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손석춘칼럼
붉은 소, 검은 소, 얼룩소. 이솝 우화에 등장한다. 늘 함께 다녔다. 사자가 덤비면 같이 맞섰다. 사자는 꾀를 냈다. 슬금슬금 얼룩소에 다가가 언구럭 부렸다. “붉은 소가 자신이 가장 힘세다던데?” 붉은 소와 검은 소에겐 거꾸로 물었다. “얼룩소가 가장 강하다며?” 붉은 소가 격분했다. 얼룩소에 덤벼 뿔 빠지게 싸웠다. 결국 소들은 뿔뿔이 갈라졌다. 사자는 얼룩소, 검은 소, 붉은 소를 차례로 잡아먹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우화를 새삼 늘어놓은 까닭이 있다. 읽을수록 노예 이솝의 슬기가 빛난다. 뿔내 싸우고 뿔뿔이 흩어진 붉은 소, 얼룩소는 오늘 누구인가. 몸 사리며 지켜만 본 검은 소는 또 누구인가.

사월 재보선을 앞둔 울산 북구를 보라. 두 진보 정당이 후보 단일화로 몸살을 앓았다. 더러 눈 흘길지 모르겠지만 명토 박아둔다. 애초 당을 쪼갤 일이 아니었다. 총선 앞에서 분열로 참패하고 1석 재보선 앞에서 손잡으려는 모습을 민중은 어떻게 볼까. 게다가 당을 쪼개는 과정에서 서로 ‘분열의 씨앗’으로 비난한 당사자가 만났다. 단일화를 이뤄도 효과적 선거운동이 가능할까 회의적 시각이 적잖은 이유다.

하지만 개탄에 잠길 일은 아니다. 울산 북구만 볼 일은 더욱 아니다. 언론에 부각되지 못했지만 눈여겨볼 곳이 있다. 평택과 시흥이다.

평택은 황새울을 품은 상징적 공간이다. 최첨단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걸 막는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을 풀며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힘을 모았다. 평택민주단체연대회의(평택연대)는 창립 선언문에서 “서로의 차이를 앞세우기보다는 침몰하는 민주주의, 나락으로 떨어진 시민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단결하고 또 단결하여 싸워나가겠다”라고 결기를 세웠다. “작은 물줄기 모여 바다를 이루고, 봉우리 모여 산맥을 이루듯이 진보 진영의 대단결로, 사회변혁의 아름다운 길로, 진군 또 진군하고자 한다.” 선언문의 결말은 힘이 넘친다. 평택연대 창립식에서 만난 강상원 집행위원장은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차근차근 공통분모를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서울과 더 가까운 시흥에선 연대에서 한발 더 나간 실험이 한창이다. 한나라당 시장의 실형 선고로 치러지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한자리에 모였다. 토론과 투표를 거쳐 주민소환운동본부 최준열 대표를 범시민 후보로 세웠다. 두 진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후보를 낸 새로운 실험이다. 시흥은 지금까지 민주당과 한나라당 후보로 시장에 당선된 4명이 예외 없이 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2대 시장을 역임한 인사를 다시 공천해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시흥에서 범시민 후보 선출은 진보-민주세력의 단결을 아래로부터 일궈 새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는 소중한 실험이다. 더구나 시민들 스스로 주민소환 운동이라는 주권 운동을 지며리 벌여온 열매이어서 더 값지다.

바로 그 점에서 시흥-평택의 길은 진보-민주세력의 대단결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라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가는 데 훌륭한 본보기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결말도 낙관만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가. 아래로부터 일궈낸 아름다운 단결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꼭뒤를 짓누르고 있는 절망을 벅벅이 이겨갈 희망이 아니던가. 저 맑은 기운이 서울로, 충청으로, 영남·호남으로 퍼져갈 수는 없을까.

그래서다. 시흥-평택이 애면글면 열어가는 새 길이 진보-민주세력에게 던지는 의미를 새겨본다. 붉은 소, 얼룩소, 검은 소 사이가 더는 쉼표일 수 없다는 게 아닐까. 시흥-평택의 길에 세운 푯말은 다음과 같이 ‘단결’ 아닐까. 붉은 소-얼룩소-검은 소.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