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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칼럼] ‘굵고 짧게’와 ‘가늘고 길게’의 조합

등록 2009-07-07 21:03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지난달 하순 일본 기타큐슈에서 일제의 조선 강점 100년이 되는 201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첫 실무토론회를 했다. 두 나라 시민단체들 사이에 교류가 활성화하면서 서로의 운동 양태에 대해 거리낌 없이 솔직한 느낌을 이야기한다. 인상비평의 하나로 “한국은 굵고 짧게, 일본은 가늘고 길게”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운동은 불이 붙을 때는 무섭게 타오르다가 열기가 식으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반면 일본의 시민운동은 소수의 활동가가 꾸준히 집요하게 문제를 끌어나간다. 이런 모임에 나가 보면 전후보상 운동을 하는 일본인들의 헌신성·전문성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강제동원 분야의 주제발표를 한 요코가와 데루오는 60대 후반의 전직 고교 역사교사다. 일본 정부는 징용자 명부 일부를 한국 정부에 제출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련 자료를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 요코가와는 10여년 전부터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자료를 수집했다. 규슈의 탄광지대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끌려와 강제노역에 종사했다. 그는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지자체를 상대로 인명피해 사고를 기록한 변재보고서, 매장·화장 인가증, 호적변동 접수대장 등을 조사해 본적이 조선으로 돼 있는 사망자들의 사망 원인과 주검 처리를 추적해왔다. 그의 노력으로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 피해자 중에 16살의 소년이 있다. 일제가 패망한 한 달 뒤인 1945년 9월 후쿠오카현 신오카탄광에서 배수펌프의 전원을 끄기 위해 갱내에 들어갔다 가스 누출로 숨진 소년은 사후 63년이 지나서 본명이 강상구로 확인됐다.

요코가와가 지자체에 정보공개를 요청해 입수한 변재보고서 가운데는 1944년 11월7일 35살의 조선인이 규슈의 메이지광업 히라야마탄광에서 변을 당해 숨졌다는 내용도 있다. 한문 창씨명 하촌순길이 낙반사고로 전신 매몰돼 질식사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요코가와는 이 희생자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한국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은 이른바 ‘이중징용’ 피해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중징용이란 우리 겨레가 일제 때 당한 가장 비극적인 피해사례의 하나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일제는 러일전쟁 이래 점거해 왔던 남사할린의 광산 개발을 위해 조선인들을 대거 동원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국 함정의 공격으로 석탄운반선의 운항이 사실상 두절되자 1944년 8월 사할린의 조선인 광부 3000여명을 규슈 등 본토의 광산으로 전환배치했다. 혹독한 작업환경에서 숨진 사람도 원통한 일이지만, 생존자들도 전후 사할린에 버려진 가족들과 수십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을 이중징용의 피해자라 한다.

자료에 따르면 하촌순길은 1942년 9월 사할린의 탄광에 동원됐다가 44년 9월 다시 규슈로 끌려와 두 달 만에 숨졌다. 나이로 보아 징용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었을 것이다. 강제동원진상규명위에 본명을 조회하지 못했다는 요코가와의 말이 마음에 걸려 일본어 검색 사이트에서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일부 자료는 열람이 불가능했다. 기관에서 접속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전후보상 운동을 하는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은 지역에서 민단·총련·종교단체들과 연대해서 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무차별로 접속을 막는다. 과거사 청산 작업에서조차 공안 회귀를 보니 씁쓰레하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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