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유언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는 너무 어려운 숙제를 국민들에게 주고 떠났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화해와 용서다. 특히 자신을 핍박한 사람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그들은 반성을 한 적도 없는데 용서를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흉내 내기 어렵다. 초인적인 의지를 가졌거나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제오늘 세상에 난무하는 화해와 용서라는 말을 들으면서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가 누구를 향해 화해를 요청해야 하는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희호씨는 서울광장에 모인 추모객들을 향해 행동하는 양심이 고인의 유지임을 재차 천명했다. 화해와 용서가 국민들에게 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면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말은 국민들에게 주는 채찍질이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투옥과 고문, 납치와 망명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거듭하면서, 그때마다 정치적 입지를 새로이 다져가며 대통령에 올랐으니까, 고립무원과 절체절명의 시간을 이겨냈으니까, 그토록 확고하게 신념에 찬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면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실천의 순간마다 인간적 한계와 좌절에 빠진다.
2006년 10월 어느 날 동교동에서 연락이 왔다. 점심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한 적은 있었지만 독대의 기회를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는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 후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고 무엇보다 ‘김심’이 어디에 있는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을 때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기가 거북해서 살아있는 정치사인 당신께서 그동안 겪어본 정치인 중에 가장 괜찮은 정치인이 누구인가 우회적으로 물었다. 그는 씩 웃으면서 “나는 객관적일 수 없어요. 나한테 잘해주고 나한테 충성한 정치인이 당연히 제일 괜찮고 이쁘지요”라고 답변을 피해갔다. 그래도 키워주고 싶은 정치인, 힘을 실어주고 싶은 정치인이 있을 것 아니냐고 물었다.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치인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키워준다고 커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크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겪어야 하는 온갖 구설과 비판을 이겨내야 합니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온갖 영욕을 혼자 감당해 낼 때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누가 키워준 것이 아니잖습니까. 판단은 국민이 하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김심’이 자신에게 있었다고, 자신이 가신 분의 ‘정치적 적자’라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부질없는 짓이고 고인을 욕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헨리 8세의 오른팔이었지만 결국 헨리 8세에 의해 단두대에 보내졌다. 같은 가톨릭교도였고 또한 정치의 최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토머스 모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할모델이었던 것 같다. 토머스 모어도 그도 집필광이고 독서광이었다. 사형수로 옥중생활을 하며 그는 자신의 세례명이 토머스 모어여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모든 국민이 용서와 화해를 하고 행동하는 양심을 보인다면 그런 세상이야말로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일지 모른다.
지금 용서와 화해를 말해야 할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이 정부고 이명박 대통령이다. 대화와 타협은, 용서와 화해는 칼을 쥔 사람이, 권력을 지닌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다. 권력이 용서와 화해로 국면을 이끌지 못하면 국민은 오로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길밖에 없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은 양날의 칼이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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