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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어느 기자의 이중생활 / 김의겸

등록 2009-12-09 21:35수정 2009-12-09 22:28

김의겸  문화부문 편집장
김의겸 문화부문 편집장
요즘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 밀린 방학숙제 하듯, 아버지를 찾는 동생들의 발길이 뻔질나다. 모여 하는 얘기가 처음에는 아버지 걱정이더니, 이내 제 자식들 공부다. 단연 ‘외고’가 현안이다.

여동생은 ‘원조 외고’에 딸애를 보내면서도 불평이다. 선생님이 사회탐구 보충수업을 해주겠다고 하자, 학생들이 “아뇨, 학원 갈 시간 없어요. 학교에서 보충수업 받으라는 건 말기 암 환자한테 보건소 가라는 얘기예요”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실컷 비웃어 줬다. “그 잘난 외고도 사교육한테 수모를 당하네. 그러면서 수월성 교육을 찾아? 애들도 싸가지 하고는….”

아들이 외고 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남동생은 벌써 입시경쟁에 지친 듯하다. “어쩌겠어. 자본주의 체제가 다들 무한경쟁으로 내모는데, 현실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쏘아붙였다. “그렇게 체념하니까, 우리 교육이 요 모양 요 꼴이야. 아이들만 불쌍하잖아.”

듣고 있었는지, 중2 아들 녀석이 툭 끼어든다. “아빠, 나도 외고 가고 싶어!” 그 순간, 침 튀겨 외고의 적폐를 논하던 기자 정신은 증발한다. 대신 종족을 보존·확산시키라는 유전자의 명령전달 체계가 ‘부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 내 자식만 뒤처지면 안 되지.”

인생 선배들의 충고는 이런 깨달음을 더 강화시켜 준다.

외고생들을 많이 뽑기로 유명한 대학이 있다. 그곳 교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딱하다는 듯 혀를 찬다. “시골 출신은 달랑 혼자서 입학하지만, 외고 출신은 그 학생을 키워낸 부모의 재력과 권력, 인간관계가 몽땅 함께 입학하는 거잖아. 당장 기부금부터가 다르지. 김 기자라면 누구를 뽑겠어?”

한 신문사는 장차관, 국회의원 자식들이 유난스레 많다. 거기서 오랫동안 편집국 지휘봉을 잡았던 대선배에게 따졌다. “고관대작 자식들은 뭐가 다릅니까?” 되레 묻는다. “김 기자 클 때 아버지 책꽂이에 책이 몇 권이나 꽂혀 있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은 직업이 뭐였나?” 말문이 막힌다. “책 구경이라도 더 했을 거고, 아버지 친구들이 다 중요한 취재원이잖아.”

허파 한쪽이 서늘해지더니, 아려온다. 마음이 다급해진다. 괜스레 처에게 “거 학원비 아끼지 말고, 잘한다는 학원 좀 알아봐”라고 트집을 잡는다. 남이 볼세라, 사교육을 부추기는 <조선일보> 교육 섹션을 가방 안에 알뜰살뜰 챙겨 넣는다. “우파는 자신의 아이를 떳떳하게 사교육 현장에 보내고 좌파는 부끄러워하며 보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그런데 나만이 아닌가 보다. 한겨레를 그만둔 뒤, 전업 저술가로 나선 선배가 한 분 있다. 그 선배, 퇴사 직후 중3짜리 아들과 함께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에 들어가 숙식을 같이하며 공부를 시켜, 끝내 외고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한겨레에도 아들딸을 외고에 보낸 ‘성공한 부모’가 몇 되나 본데, 그 비법이 뭔지 캐고 싶은 심정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더니, 다들 교육철학은 배부른 얘기고 입시 경쟁이 발등의 불인 셈이다.

젊은 기자들은 선배들의 이런 이중성을 놓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할 말이라고는 “너도 자식 낳아서 키워 봐라”밖에 없다. 궁색하다.

오늘(10일) 교육부가 외고 입시 개선 방안을 발표한다고 한다. 중2부터 적용된다니 당장 아들 녀석이 해당된다. 나로서도 이중생활을 청산할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돌아가는 본새가 불길하다. 답답한 마음에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홈페이지를 뒤적이다,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적어 놓는다. “나 좀 살려줘!”

김의겸/문화부문 편집장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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