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 부국장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코펜하겐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번 세계기후회의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매우 호기롭다. 100명이 넘는 대표단은 지난달 내놓은 온실가스 감축 계획안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의무 감축국이 아니면서도 자발적으로 감축하겠다는 다짐에 국제사회가 박수를 보낸 데 고무된 듯하다.
이 대통령이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전략으로 선포한 것은 지난해 광복절 때다. 이후 1년여 사이에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 그린에너지산업전략 발표,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출범, 녹색성장 5개년 계획 발표 등 후속타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웬만한 정책엔 죄다 ‘녹색’을 붙이는 게 유행이 됐다. 세종시 대안으로 가장 먼저 거론된 것도 ‘녹색기업도시’였다. 여전히 대운하 전단계라는 의심을 사고 있는 4대강 사업엔 일찌감치 ‘녹색뉴딜’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강바닥을 파내고 둑을 쌓는, 자연 복원이 아닌 자연개조를 녹색사업이라 하는 배짱이 대단하다. 지난달 ‘대통령과의 대화’ 이후엔 속도전까지 붙었다. 애초 2012년 말로 예정하던 것을 1년 반이나 앞당겨 끝내겠다고 한다. 그래야 돈이 덜 들기 때문이란다. 생태계나 부실공사 등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들은 효율을 앞세운 논리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만사가 이런 식이다.
녹색성장의 방점을 녹색 아닌 성장에 둔 데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그렇다 보니 규제 완화 바람을 등에 업고 환경규제까지 후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20년 발생 전망치의 30% 감축’이라는 온실가스 배출 목표도 생색내기용이라는 지적이 있다. 전망치는 성장 속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생태문제 연구가 스탠 콕스는 <녹색성장의 유혹>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런 유의 전략이 ‘녹색 거품’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녹색성장 전략은 높아진 에너지 효율성으로 결국 더 많은 에너지 소비나 탄소 배출을 하는, 산업 확장의 녹색 포장술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확실히 녹색 시대를 갈망하고 있다. 코펜하겐 현장의 북새통이 그걸 말해준다. 지구 온난화 책임에서 예외가 아닌 우리에게도 녹색경제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문제는 ‘회색’으로 녹색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 중심에 70년대 건설 역군 정신으로 무장돼 있는 대통령이 있다.
우리 경제는 수출을 통해 압축성장해온 결과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형 경제로 꼽힌다. 경제 규모에 비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한다는 얘기다. 녹색경제는 이런 틀거리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그 토대는 내수를 다지는 것이다. 탄탄한 내수산업은 경제 안정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내수의 버팀목은?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서민이다. 수출산업의 주역인 재벌들은 성장 동력을 밖에서 찾은 지 오래다. 정부도 익히 아는 우리 경제의 현주소다. 그래서인가, 이 대통령은 새해 업무보고를 보건복지가족부 등 서민정책 부처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예산이 대폭 깎이거나 말잔치뿐인 서민정책들이 많았다. 입으로는 서민을 말하면서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탓이다. 진정한 녹색성장을 바란다면 이제 발상을 전환하자. 서민의 일상을 챙기는 것이야말로 회색경제에서 녹색경제로 가는 패러다임 전환의 첫걸음이다. 더딜지라도 그것이 바른길이다.
그러자면 대통령부터 회색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녹색성장의 비전은 그제야 서서히 녹색을 띨 것이다. 수십년 정들 대로 정든 그 회색 옷은 기후변화회의 사무국에 선물로 주고 오면 제격이겠다.
곽노필 부국장nopil@hani.co.kr
곽노필 부국장nopi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