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통합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탈리스(Thalys) 고속철 운행구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치러진 국민투표 결과와 관련해 이 구간이 `정치적 대지진' 발생지역이 돼버렸다고 비유했다. 파리-브뤼셀-암스테르담(또는 쾰른) 구간을 날렵하게 질주하는 이 최신형 테제베(TGV)는 유럽통합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전동차 부분은 유럽의 힘을 상징하는 `유러피안 레드'의 산뜻한 빨강색으로, 객차 부분은 유럽연합이 지향하는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은색으로 치장돼 있다. 쾰른이 속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지난달 22일 선거는 유럽통합의 중심축의 하나인 독일의 조기총선을 불러온 점에서 탈리스 노선에서 발생할 대격변을 알리는 예고지진이었던 셈이다.
두 차례 지진의 여파로 25개 회원국 모두의 비준이 필수불가결한 유럽헌법은 사실상 사문화의 문턱에 들어섰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애써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쌓아 온 유럽통합 노력의 위기임에 분명하다. 지난해 10월 헌법 초안에 서명할 때만 해도 유럽연합의 창설멤버 국가들에서 반대 표가 쏟아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2년여 동안 협상의 산물인 유럽헌법은 확대된 유럽연합의 새로운 틀을 제시한 역사적 문건이다. 기존의 통합관련 조약들을 통합하고, 대통령과 외무장관 제를 신설하고 정책결정과정을 단순화했다. 이런 점에서 단일통화를 도입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대한 1992년 덴마크의 거부나 회원국 확대 등을 규정한 니스조약에 대한 2000년 아일랜드의 거부 때와 비교해도 이번 파문은 클 수밖에 없다.
두 차례의 충격에 정신을 차린 듯 주요국 정상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오는 16~17일로 예정된 유럽연합 정상회의는 헌법안을 되살리는 문제를 포함해 통합 유럽의 정체성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 위기 대책회의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기대하기 힘든다. 유럽통합의 중추인 프랑스와 독일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한 데다, 하반기 순번제 의장국이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영국이란 점 때문에 위기의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
정상들은 두 나라의 거부 이후 거부 도미노현상의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두 나라의 경우에서 보듯, 일반 국민이 별도의 부속문을 빼고도 191쪽에 달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헌법안을 완전히 이해하고 반대했을 리 만무하다. 단일통화 도입과 유럽연합 확대 이후 삶의 질이 떨어진 데 대한 불만과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극우에서 극좌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조직화되지도 않은 헌법 반대세력은 일반 국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 침체한 경제가 살아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 확대·통합으로 인한 부담은 늘고 복지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다.
네덜란드의 얀 레테르 발케넨데 총리가 “유럽의 이상은 정치인들에게는 살아있지만 국민에게는 아니다. 이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데 대한 뒤늦은 후회이다. 정치지도자들의 의지와 국민 정서 사이의 깊은 괴리는 오늘날 유럽통합이 안고 있는 현실이자 문제점이다. 국민의 정서와 기성정치권의 인식의 골이 큰 한국정치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현재 25개국으로 확대된 유럽연합의 현재 모습은 전후 유럽대륙에서 전쟁 참상의 재발을 막기 위해 통합운동의 첫걸음을 뗀 장 모네와 로베르트 슈만 등 ‘유럽통합의 아버지들’이 상상했던 그 이상이다. 지난 반세기의 유럽통합 역사를 돌아볼 때, 통합과 확대의 지체는 있을 망정, 통합과 확대의 대세가 뒤집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이번 위기로 인한 정체의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탈리스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이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의 고속철 뿐 아니라 미래엔 동유럽까지 확대·연결될 것이다.
전진과 지체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가는 유럽통합은 이제 막 동아시아 공동체에 운을 떼고 있는 한국 등 동북아국가들에게도 주권국가간의 정치·경제적 통합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예시하고 있다. 류재훈/국제부 기획팀장 hoonie@hani.co.kr
전진과 지체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가는 유럽통합은 이제 막 동아시아 공동체에 운을 떼고 있는 한국 등 동북아국가들에게도 주권국가간의 정치·경제적 통합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예시하고 있다. 류재훈/국제부 기획팀장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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