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일제 때 징용 등으로 일본에 강제연행돼 사역을 하다가 숨진 한국인의 유골이 2601위 있는 것으로 지난주 보도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2005년 중순부터 지난해 말까지 뒤섞여 합쳐진 유골을 빼고 일일이 집계한 것이라고 하니 돌아오지 않은 유골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보도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제어하기 힘들다.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밀어내기 경쟁을 하느라 유골 따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는 변명은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
일본 사회에서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기막힌 삶을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조선대학교에서 교원을 하던 박경식이다. 1965년에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낸 그는 중국 정부의 유골 수습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1950년대 중국 홍십자회 회장으로 일본에 와 중국인 희생자의 유골 수습에 기여를 한 리더취안은 목사의 딸로 태어나 군벌의 영수였던 펑위샹과 결혼했으며 신중국 성립 후 위생부장(장관) 등을 지냈다. 그의 방일은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래 중국 정부 관계자로서는 첫 일본 방문으로 기록됐다. 당시는 미국이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 국민당 정권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중국 대륙 봉쇄정책을 취하던 때라 그의 방일이 성사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미귀환 유골 문제가 여전히 목 안에 박힌 가시처럼 짓누르고 있는 이때 중국의 유골 수습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수교 상태에서 유골 문제를 푸는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전쟁 기간 중 일제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협조했던 일본 불교계 내부의 자성 움직임이다. 2차대전 중 중국에서 강제연행된 중국인 노무자는 약 4만명이다. 이들은 일본 각지 135개 사업소에 배치돼 혹사를 당했는데 약 70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 반환을 새로운 대중국 관계의 출발점으로 본 불교계 일부와 진보진영은 ‘중국인 포로순난(殉難)자 위령실행위원회’를 구성해 힘을 결집시켰다.
둘째는 중국에 잔류중인 일본인 거류자와 일본인 전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한 베이징 정권의 유연한 외교정책이다. 중국은 1952년 12월말 잔류 일본인 조사 결과를 라디오로 발표하고 귀국 희망자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적십자사·일중우호협회·평화연락회는 바로 대표단을 베이징으로 파견해 협상을 벌였다.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중국이 전면충돌을 벌이고 있는 시점에서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귀환자들을 잔뜩 태운 여객선이 오고 갔다. 중국인 희생자 약 5000명의 유골도 이때 돌아갔다. 중국은 유골을 포로 희생자가 아니라 ‘항일열사’로 맞아들였다.
셋째는 중국 대륙과의 무역·경제교류 확대가 일본 경제의 재생에 필요하다고 본 정계 일부의 움직임이다. 불교계와 위령실행위원회가 중국의 잔류 일본인 송환 조처에 답례하기 위해 홍십자회 대표단을 초청했으나 요시다 내각은 계속 승인을 주저했다. 결국 국회에서 초청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야 중국 대표단이 1954년 10월말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 불교계와 진보진영이 한국·조선인의 유골 송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하지만 2004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출범하기 전에는 우리 정부 차원에서 유골 문제를 전담하는 기관이 사실상 없었다. 진상규명위도 별도 입법 조처가 없으면 조만간에 문을 닫아야 한다. 하염없이 늘어진 유골 수습 작업은 언제쯤에야 해결 가닥이 잡히려나?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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