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그때 서울대에서 ‘학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위가 빈번했는데, 학사건도 그런 시위 가운데 하나다. 한데 대학 시위에 이런 아리송한 이름이 붙여진 사연이 애처롭고 한편으론 우습다.
당시 대학 시위는 대개 주동 학생이 “학우여!”라고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시작됐다. 하지만 문제의 시위는 주동자가 ‘학우여’라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싱겁게’ 끝났다. 시위진압 경찰관들이 순식간에 주동자를 덮쳐 입을 틀어막았다. ‘학사건’은 그 짧은 외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무렵은 대학 구내 잔디밭은 물론, 도서관이나 건물 복도에까지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표현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학 안에서조차 표현·집회·시위의 자유가 질식당한 시대였던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여러 대학에서 ‘학사건’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라도 한 것일까? 검찰이 잇따라 논란을 빚은 ‘표적기소’ 사건들에선 ‘학사건 시대’의 음울한 분위기가 그대로 피어오른다.
물론 지금은 공권력이 우리의 일상을 대놓고 짓누르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말을, 비판을, 집회를 옥죄는 정권의 통치 메커니즘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검찰 기소라는 ‘세련된 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 <한국방송>(KBS)의 정연주 전 사장, <와이티엔>(YTN)의 해직기자들, <문화방송>(MBC)의 ‘피디수첩’ 제작진은 그 칼의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이것은 퇴행이다. 민주정부 출범 이후 다시는 역사의 페이지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자유’라는 단어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됐다.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 보수 시민단체들의 집중적인 ‘지원사격’을 받으며 검찰은 민주사회의 기초인 자유권을 법정으로 끌고가 흔들고 있다.
이들 사건에서 검찰이 줄줄이 패소한 것은 그 뒷걸음질에 대한 법원의 당연한 제동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판 결과를 예상하며 가슴 졸이고, 당연한 결과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음 재판의 결과를 염려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비판을 ‘자기검열’하고, 그 수위를 ‘조절’한다. ‘혹시 모난 돌이 정 맞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에 주위를 둘러본다. 이런 위축과 소외화야말로 잇단 무리수를 써가며, 법원의 판결에도 아랑곳 않고 자유권을 기소하는 정권의 노림수다.
흔히 민주주의나 인권은 자유권에서 평등권·사회권으로 진전한다고 얘기된다. 양심이나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교육의 기회균등, 노동·인간다운 생활·환경·보건의 권리 등으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서구의 선진사회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자유권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평등권·사회권을 넓히는 경로를 밟아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선 경로 이탈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평등권·사회권의 확대에 진력해도 부족한 터에 자유권을 지키려는 싸움이 한창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낭비요 후퇴지만, 중단할 수 없는 싸움이다. 자유적 권리를 굳건히 하지 못하고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아냥대지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30~40년 전으로 뒷걸음치고 있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jjk@hani.co.kr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선 경로 이탈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평등권·사회권의 확대에 진력해도 부족한 터에 자유권을 지키려는 싸움이 한창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낭비요 후퇴지만, 중단할 수 없는 싸움이다. 자유적 권리를 굳건히 하지 못하고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아냥대지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30~40년 전으로 뒷걸음치고 있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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