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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대통령의 처신 / 정재권

등록 2010-03-31 21:54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정치권에서 회자됐던 김영삼 정부 때의 일 하나. 김영삼 대통령이 한 측근을 꾸짖다 “당장 나가 한강 물에 빠져버려”라고 성을 냈다. 불호령을 들은 측근은 얼굴이 하얘졌고, 황급히 방을 나오다 캐비닛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질책에 넋이 나가 캐비닛을 방문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누군가 우스개로 꾸며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지만, 이 ‘일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상상 이상의 무게감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한 기침이 아래에선 태풍’이라는 말 그대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서도 말의 힘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대통령은 취임 한 달여 만인 2008년 3월31일 ‘일산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으로 혼이 나던 경기 고양시 일산경찰서를 방문해 으름장을 놨다. “일선 경찰이 생명의 귀중함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일선 경찰이 너무 해이해 있다.”

가뜩이나 집권 초기에, 그것도 일선 경찰서를 직접 찾아간 대통령의 질책이 경찰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6시간여 뒤의 상황이 잘 보여준다. 경찰은 이 대통령이 꾸지람을 한 지 6시간30분 만에 용의자 이아무개씨를 체포했다.

3월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여중생 유괴·살해 사건’도 비슷한 경우다. 이 대통령은 범인이 좀체 검거되지 않자 3월8일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최대한 범인을 빨리 잡도록 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대통령 지시 이틀 만인 10일 범인 김길태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답답함과 질책이 반드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30일 천안함 침몰 현장을 전격 방문해 해군을 독려했다. 현직 대통령이 군사적으로 위험한 백령도를 방문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그만큼 이 대통령의 관심과 안타까움이 크다는 방증이다.

이 대통령은 실종 병사 46명의 구조가 특히 중요하다며 해군 당국에 이런 당부를 했다. “선체 인양도 중요하지만 잠수부가 내려가 생사를 빨리 확인하고 구조해야 할 텐데, 내려가서 (함미의) 문을 열고 확인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대통령의 독려 이후 ‘공교롭게도’ 실종 장병 수색작전을 펼치던 해군 특수전여단의 한주호 준위가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숨을 거뒀다. 물론 이 대통령의 당부와 한 준위의 순직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한 준위가 작업을 하다 숨진 곳은 함미에서 6㎞ 이상 떨어진 함수 근처였다.

다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실종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이 자식 같고 형제, 부모 같은 심정에 한걸음에 달려온 대통령의 ‘선의’가, 꼭 그대로의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지독히도 열악한 여건 속에서 구조요원들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해난구조대는 밤에는 작업하지 않는다는 일반 원칙이나, 잠수사가 40m 이상의 물속에 들어가려면 별도의 장비가 필요하다는 안전규정을 준수할 겨를이 없다. 국방부 스스로 “규정 위배를 감수하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다. 게다가 군은 무능한 사고 대응에 대한 국민의 질책으로 거의 넋이 나간 상태다.

이처럼 악조건이 겹친 상황에서 대통령의 독려가 혹 구조작업에 ‘부담’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이 대통령의 충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좀더 신중한 고려를 했으면 한다. 대통령의 처신은 정말 크고 무거운 영향을 끼치니까.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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