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8년 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 빨간 옷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을 보며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소심한 이들은 한국에서도 훌리건들의 난동 같은 게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우파는 빨간색을 보며 두려워했고, 좌파는 집단적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 걱정들이 모두 기우로 판명되면서 언론들은 저 엄청난 에너지가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애국심, 신세대 등의 단어로 설명하려 했지만 썩 신통치가 않았다. 16강전, 혹은 8강전을 치르던 날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 주변엔 연립주택 반지하층에 들어선 소규모 봉제공장(세칭 마치코바)들이 많았다. 어쩌다 들여다보면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비좁게 모여 밤늦도록 일하고 있었는데, 평소 길에선 그들을 잘 볼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동네 골목의 한 호프집에 그 여성들 10여명이 빨간 티셔츠에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나와 앉아 있었다. 의상까지 차려입고서도 열렬히 응원할 줄 모른 채 그냥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그 어색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네 골목까지는 나왔지만, 저 도심의 열기는 그들에게 낯선 듯했다. 그 열기에 대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익숙해하고, 또 낯설어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건 이제껏 보지 못한 성대한 축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낯선 느낌도, 이런저런 걱정은 물론이고 궁금증도 약해졌다. 다시 월드컵을 앞두고 텔레비전에서 한 광고를 봤다. 김장훈과 싸이가 나오는 통신사 광고였다. 김장훈은 냉면집 배달부이고, 싸이는 그렇고 그런 회사의 사무원이다. 일상이 지루하고 무료해 보인다. 저만의 특별한 목표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애인도 없는 것 같다. 둘이 우연히 만나선 무척 반가워한다. (월드컵 응원 때 둘이 날렸던 모양이다.) 두 눈이 번뜩인다. ‘아, 월드컵이 다시 왔네!’ 하는 표정이다. 빨간 옷 입고 뛰어나가 거리를 내달린다. ‘무슨 일 없나’ 하며 심심해하다가 어디서 소동이 벌어지면 자기 일과 큰 상관이 없음에도 달려가는 동네 청년들, 옛날 같으면 어머니한테서 ‘초상집 개가 초상 만났네! 하는 소릴 들었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이다. 광고를 보며 ‘맞아, 저런 건데’ 싶었다. 저렇게 단순한 것이었을 텐데…. 저런 동네 청년들의 심리가 정치적으로 위험해질 게 뭐가 있다고 되도 않는 우려를 하고…. 그러고 보니 그 광고가 용감해 보이기까지 했다.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을 성스럽게 여기고, 월드컵 승패에 국운이 달린 것처럼 말하는 분위기에서, 응원하러 달려가는 이들을 저렇게 묘사하다니. 시비 거는 이들이 없나 싶어 인터넷을 봤더니 ‘통신사들이 월드컵을 마케팅 수단으로만 본다’는 식의 문제제기가 있을 뿐, 광고 내용에 대해선 대체로 반응이 좋은 것 같았다. 역시 진솔한 건 통하는 모양이다. 8년 전 월드컵 때 대학생이던 이들이 이젠 20대 후반~30대 초반이 됐을 거다. 이른바 ‘88만원 세대’일 거고 높은 청년실업률에 시달렸고 또 시달리고 있을 거다. 일상의 피곤함, 무료함, 1등 하는 이들끼리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의 소외감 같은 것 다 잊고 한판 놀자고 선동하는 그 광고는 웃기면서 약간 슬프기도 했다. 거룩하게 여기는 걸, 찌질한 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말하는 것. 그러면서 축제에의 열망은 절실하게 드러내고…. 이런 게 대중문화의 장점이 아닐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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