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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눈]
진보신문에 부족한 것은 ‘오피니언 + 비주얼’

등록 2010-05-25 21:09수정 2010-05-25 22:52

<가디언>이 비행기 탄소 배출 문제를 다룬 기사에 배기가스가 나오는 칙칙한 사진 대신 아름답게 디자인된 항공기 꼬리날개 사진들을 배열한 것은 디자인을 고려한 선택이다.(왼쪽)
2009년 12월7일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에 맞춰 1면 전체를 오피니언면으로 활용해 사설을 실은 <가디언>.(오른쪽)
<가디언>이 비행기 탄소 배출 문제를 다룬 기사에 배기가스가 나오는 칙칙한 사진 대신 아름답게 디자인된 항공기 꼬리날개 사진들을 배열한 것은 디자인을 고려한 선택이다.(왼쪽) 2009년 12월7일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에 맞춰 1면 전체를 오피니언면으로 활용해 사설을 실은 <가디언>.(오른쪽)
사진·그래픽·일러스트는 의견저널리즘 구사 수단
지면개편, ‘프리미엄 미디어’ 변신 토대로 삼아야




내가 보기엔 미국 의료보험 개혁의 주역은 오바마 대통령이 아니라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이다. 미국에서 무어가 <화씨 9/11>로 반전여론을 일으키고,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자유로운 총기 소지를 풍자하고, <식코>로 의료보험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았더라면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기도 어려웠으리라.

비정상적인 미국 사회의 모습들을 다른 나라와 극적으로 대비시켜 소수 지식인층에 머물던 진보담론을 대중의 열망으로 바꿔놓았다. <식코>는 미국 의료보험제도가 캐나다·영국·프랑스 같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미국인들이 증오하는 카스트로의 쿠바보다 훨씬 열악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미국에도 이런 이슈들을 줄기차게 제기해온 진보진영 연구소와 종이매체는 꽤 많았으나, 미국 사회를 바꿀 만큼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단순히 발행부수로 영향력을 말하는 것은 무리지만, 미국의 대표적 진보잡지인 <먼슬리 리뷰>는 고작 수천부를 찍어낸다. 그런데 <식코>는 미국에서 수천만명이 관람했으니 영상을 통해 만 배의 사람들을 감동시킨 셈이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만한 것은 세계 유수의 진보신문들도 ‘오피니언+비주얼’, 곧 의견과 시각적 요소의 결합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디언>을 필두로 <르 몽드>, <라 스탐파>(스페인), <라 레푸블리카>(이탈리아) 등은 모두 베를리너판으로 판형을 바꾸면서 오피니언면을 강화하고 시각적 요소를 대거 도입했다.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진보담론들을 재미있고 설득력있게 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한겨레>가 창간 22돌을 계기로 오피니언면을 강화하고 온라인 사이트인 <훅>을 창설해 여론 형성 과정에서 독자와 교감하기로 한 것은, 이 난을 통해서도 몇 번 제안한 적이 있어 더욱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더 획기적으로 변신해 오피니언면을 하루 2~3개에서 3~4개로 늘리고 ‘오피니언+비주얼’이라는 세계 진보신문의 조류를 탈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오피니언면 확대는 온라인과 모바일 등이 ‘매스미디어’ 구실을 대신하면서 신문은 ‘프리미엄 미디어’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세계신문협회 총회에서 ‘인터내셔널 미디어컨설팅그룹’ 후안 세뇨르 부사장은 ‘뉴스 대 분석’의 비율을 ‘8 대 2’에서 ‘2 대 8’로 바꾸고 신문에 잡지의 장점을 더한 ‘뉴스진’(Newszine) 형태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국내정책, 미국의 대외정책.’ <인디펜던트>는 대조 수법으로 부시가 “죄 없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며 줄기세포 연구에 거부권을 행사한 뒤 아기를 안고 포즈를 취한 장면과 전쟁으로 죽은 이라크 어린이가 관조차 없어 비닐봉지에 싸여 있는 장면을 나란히 배치했다.(왼쪽)
<리베라시옹>이 ‘프랑스 사르코비지옹’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르코지가 장악한 프랑스 공영방송을 풍자하고 있다.(오른쪽)
‘미국의 국내정책, 미국의 대외정책.’ <인디펜던트>는 대조 수법으로 부시가 “죄 없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며 줄기세포 연구에 거부권을 행사한 뒤 아기를 안고 포즈를 취한 장면과 전쟁으로 죽은 이라크 어린이가 관조차 없어 비닐봉지에 싸여 있는 장면을 나란히 배치했다.(왼쪽) <리베라시옹>이 ‘프랑스 사르코비지옹’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르코지가 장악한 프랑스 공영방송을 풍자하고 있다.(오른쪽)
세계 유수 신문들을 모니터링하다 보면 비주얼 쪽에서도 <한겨레>가 취할 만한 게 많다. 우선 <한겨레>를 비롯한 한국신문들은 뉴스면에서 사진을 매우 인색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디언>은 가로 5단으로 편집되는 1면에 가로사진의 경우 3단이나 4단으로 아주 크게 싣는다. 지면 한가운데 기사와 상관없는 사진을 크게 싣고 머리기사 자리에는 1단으로 기사를 배치하기도 한다.


<한겨레>는 사진을 구색 맞추기로 옹색하게 쓰는 때가 자주 있다. 이슈 싸움에 강한 <인디펜던트>와 <리베라시옹>은 판형이 작긴 하지만 아예 1면 가득 사진이나 그래픽을 실어 한 가지 이슈만 부각시키는 편집으로 유명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신문 독자들이 기사에는 평균 12%만 주목하지만, 1단 사진에는 42%, 4단 사진에는 70%가 주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잘나가는 신문의 1면에는 기사를 보조하는 데 그치는 사진보다는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독자적인 사진, 감성에 호소하거나 휴머니즘이 넘치는, 그야말로 ‘이 한 장의 사진’이 많이 배치된다. 그런 사진을 날마다 찍기는 어렵겠지만, 외국 신문은 물론이고 국내 다른 신문에도 실린 좋은 외신사진마저 자주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해 4월21일치 <조선일보>는 국내 통신사인 <뉴시스>가 송고한 벚꽃 지는 사진을 1면 머리에 4단 크기로 쓰고, ‘꽃은 진다… 청춘이 그러하듯이’라는 감성적인 제목을 달았다. 자사 기자가 애써 찍어온 사진이라 하여 우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넥타이밖에 달라진 게 없는데도 매일 봐야 하는 정치인들 사진, 승리팀의 환호나 슛 장면 등 승리에 집착하는 스포츠사진에는 승자의 기쁨은 있어도 독자의 감동은 없다.

비주얼 시대에 적합한 지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 취재부서도 기사 기획 단계부터 시각적 요소를 염두에 둬야 한다. 사진을 적게 쓰기로 유명했던 <르 몽드>가 문화면을 컬러면에 배치하고, 특히 디자인·건축·패션 기사를 많이 내보내는 것도 색감을 살리기 위한 변신이다. <인디펜던트>는 종종 두 장면의 사진을 1면에 대비시켜 강력하게 이슈를 제기한다.

전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는 ‘토건국가 행진’을 저지하는 데도 사진과 그래픽이 기사보다 더 큰 힘을 쓸 수 있다.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가는 모래톱과 여울과 둔덕의 숲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들을 기록해두는 것은 비주얼 시대 인쇄매체의 임무였을 터이다. 지율 스님이라도 몇 장 찍어둔 게 있어 공사 전후를 비교할 수 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래픽과 일러스트는 신문 제작자의 의도를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견저널리즘을 구사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자칫 딱딱해서 외면하기 쉬운 오피니언면을 읽게 만드는 유인책이 된다. 의견저널리즘의 전통이 강한 유럽 신문들은 특히 4~5쪽에 이르는 오피니언면마다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를 크게 그려 넣는다. 한국 신문처럼 필자의 얼굴사진들만 들어가는 오피니언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비주얼 시대에 앞서 가는 신문이 되려면 편집국 조직도 편집·디자인·사진부서가 신문 제작을 선도하고 일반 취재부서에 주문을 하는 위치로 격상되어야 하리라. 한국 신문의 위기는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과 제작시스템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고 본다.

고정관념과 관행이 벽처럼 느껴질 때 그 조직은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드골은 <르 몽드> 창간호에 “무기력한 것, 그것은 지는 것”이라고 썼다. <한겨레>도 모처럼 시행한 지면개편이 ‘변화의 일단락’이 아니라 거기서 동력을 얻어 ‘변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고대한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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