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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임범의 노천카페] 칸이라는 언덕마저도

등록 2010-05-28 21:02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상품의 소비자로서 한국 대중의 기호는 변화무쌍하다. 기대받지 않았던 뜻밖의 콘텐츠에 열광하다가, 그 비슷한 다른 게 나오면 이내 시들해진다. 그래서 예측이 어렵다. 이걸 역동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쉽게 흥분했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냄비근성’과도 통한다. 긍정적으로 보건 부정적으로 보건, 이런 변화무쌍함은 1990년대 말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 영화가 그 호황 속에서도 한국형 장르영화를 안착시키지 못한 채 다시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든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감독으로선 갑갑한 일일 거다. 대중의 기호가 급변하는 속에서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먹고살 텐데 그게 쉬운 일인가. 두세 편 흥행작을 만들어도 한 편 실패하면 다음 영화를 찍기 힘들어지고, 두 편 연속 흥행에 참패하면 감독으로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한다. 지금 당장 봐도 50살 넘어 영화 찍고 있는 감독이 열 명도 안 된다. 2~3년 전부터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급감하면서 감독들의 위기감도 더 커진 모양이다. 몇몇 감독끼리 모여서 ‘한국에서 감독 한 명만 영화 찍으라면 누가 될까?’ ‘한 명 더 찍으라고 하면 누가 될까?’ 하는 식으로 서바이벌 순위까지 뽑아봤다는 말을 들은 게 벌써 재작년이다.

그러다보니, 오래전부터 ‘칸영화제’가 한국 영화감독들이 믿고 기댈 가장 큰 언덕이 됐다.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이 영화제에 초청되고 상이라도 받으면 연출력을 공인받는 셈이니 영화 한두 편은 더 찍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중의 변덕스러움과 예술적 잣대의 엄밀함, 둘 중 어디에 맞추는 게 더 쉬운 일일지 쉽게 말하기 힘들 거다. 하지만 최소한 운이 덜 작용하는 게 후자가 아닐까.

2000년 <춘향뎐>을 필두로 한국 영화가 칸 경쟁부문에 진출하기 시작한 뒤로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 홍보 마케팅의 중요한 변수가 됐다. 2007년 전도연이 칸의 여우주연상을 받자, 국내 대중에게 예술행사로 여겨지던 칸영화제에 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까지 보태졌다. 얼마 전 끝난 올해 칸영화제에 출품된 한국 영화 세 편에 대한 소식이 매일같이 지상파 텔레비전에서 중계된 건, 이 영화제가 한국 대중에게도 어지간히 가까이 다가섰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지만 그와 반대로 칸영화제 출품 및 수상 사실이 영화 흥행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효과는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 칸 경쟁부문 출품 사실과 함께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시>는 2주 동안 관객이 고작 12만명이다. 그사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사실이 크게 보도됐는데, 제작사 쪽은 수상으로 늘어난 관람객 수를 2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제작사 쪽은 “상을 받지 못했다면 관객 수가 10만명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며 “상을 받은 덕에 상영관이 많이 줄진 않았지만, 관람하기 좋지 않은 시간대에 맞춰 교차상영을 하기 시작해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감독들이 칸영화제에 기댄 게 어차피 흥행 효과는 아니었을 거다. 완성도를 인정받자는 건데, <시>의 각본상 수상은 칸과 한국 영화 사이의 또다른 괴리를 드러냈다. <시>의 수상과 함께 이 영화가 영화진흥위원회의 마스터제작 지원 대상작 심사에서 한 심사위원으로부터 ‘0점’까지 받으며 탈락한 사실이 뒤늦게 도마에 올랐다. 영진위의 조처를 두고, 전 정부의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논란이 뒤따랐다.

영진위 쪽은 <시>의 시나리오 형식이 일반 시나리오와 달랐다고 하지만, 제작사 쪽은 애초부터 영진위가 시나리오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정황을 살펴보면, 이 사안은 차라리 ‘정치적 보복’인 게 더 나을 것 같다. 같은 시나리오를 놓고 정치적인 변수가 전혀 없이 순전히 미학적으로만 판단했는데, 칸영화제와 영진위의 결론이 이렇게 달리 나왔다면 더 답답한 일 아닌가. 그렇게 잣대가 다르다면 한국의 감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나마 믿고 비빌 언덕이 칸영화제인데.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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