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과 교수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위치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한 언론사가 지난해부터 영국의 대학평가 회사인 큐에스(QS, Quacquarelli Symonds)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는 한국어 논문에 대한 점수가 아예 고려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이 언론사의 대학평가 기준은 연구능력(60%), 교육수준(20%), 졸업생 평판도(10%), 국제화(10%) 등 네 분야를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데, 연구능력과 국제화가 모두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을 전제로 평가된다. 결국 영어 논문 비중이 70%나 반영되게 짜여 있다. 또 평가의 총괄책임자도 벤 소터라는 영국인이다.
큐에스의 대학교수 연구능력 평가는 ‘스코퍼스’(www.scopus.com)라는 네덜란드 회사가 만든 데이터베이스와 검색 엔진을 이용한다. 스코퍼스는 세계 약 2만5000여개 학술지를 국제 저명 학술지로 등록하고 있는데, 이 학술지들은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이 기준을 따르면 한국어로 쓴 논문은 0점 처리 된다. 각 대학의 반응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모든 대학은 국제 저명 학술지 게재율을 높이기 위하여 상당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이나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예술 및 인문과학논문인용색인(A&HCI) 1편당 현재 1억원을 지급하며, 경희대는 국제 저명 학술지 논문 1편당 600점을 부여한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면 0점을 받는 현실에서 한국 대학교수들이 한국어로 논문을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는 교수는 ‘패배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10년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한국어는 학문어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잃고 저급한 2류 언어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이런 대학개혁이 성공할 경우,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인도·필리핀 같은 나라의 위치로 전락할 것이다. 이들 나라의 지식인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모국어로는 학문도 철학도 할 수 없어 영어로 모든 고급문화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수들이 더이상 한국어로 논문을 쓰지 않을 때, 한국어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학문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청’을 세운 만주족과 ‘원’을 세워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몽골족도 한자와 중국어에 문화 주도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인류 최초의 학문과 사상, 문학을 꽃피웠던 수메르어와 산스크리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럽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아직도 서양 여러 나라의 언어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고급문화생활이 영어로 이루어지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문맹’에 빠지게 된다. 언어 차별은 인종 차별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땅에서 영어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인종 차별을 받고 있다. ‘영어를 하는 한국인’과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으로 나뉘어 차별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도 나서서 저항하지 않으면 말이다.
사족 1: 국제화는 영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한류의 영향으로 일본과 중국, 동남아 각국에서 한국어 열풍이 분다. 이런 국제화가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과거에 태권도가 한국어 구령으로 세계화에 성공한 것도 참고가 될 것이다. 영어에 종속되는 국제화를 멈춰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사족 2: 유전자 조작에 의해 우리나라 여자가 낳는 아기들이 모두 서양인이 되는 상황이 온다면 끔찍하겠죠? 한국 학자들이 쓰는 논문이 모두 영어라면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유재원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과 교수
유재원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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