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기고] 유아 성폭행 보도를 하는 언론에 / 김용세

등록 2010-07-13 20:47

김용세 대전대 법학과 교수
김용세 대전대 법학과 교수
김형,

어느새 또 한 학기가 지났습니다. 전에는 “학기를 마쳤다”고 말했는데, 문득 내가 시간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저 홀로 지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즈음 세상사를 보노라면 그저 시간이 흘러 기억이 스러지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 특히, 최근 잇따라 발생하는 어린이 성폭력사건 보도를 보고, 처음 한동안은 단지 언론기업의 이윤추구 속성과 조직원의 공명심 때문에 선정성이 좀 지나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집요하게 이런 종류의 사건 보도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문득, 이들은 자신이 선의로 행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챘습니다.

우선, 일부 언론사가 강호순에 이어 김수철의 얼굴을 공개한 것은 오직 정의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그 결정은 너무나도 위험해서 오히려 무모해 보입니다. 지난 세기 서구사회가 교조처럼 받들었던 무죄추정의 원칙은 결코 범죄자의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의 권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무오류의 절대적 존재가 아닙니다. 현대 형사사법 시스템은 허점투성이입니다. 단 한명이라도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일지라도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 대중의 분노를 등에 업고 또는 정의감에 불타서 무죄추정을 깨뜨리면, 내일은 대중의 분노가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2000년 11월 발생했던 희극인 주아무개씨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2001년 11월 항소심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의 실추된 명예와 파괴된 사생활에 관해 우리 언론과 일부 여성계가 어떤 사죄를 했는지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만일 대중의 호기심 섞인 분노가 무죄추정을 깨뜨릴 근거가 된다면, 우리는 앞으로 매우 위험한 사회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해자의 권리를 입에 담기 어렵다고. 우리 언론은 특히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뜨거운 동정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같은 범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곤 합니다. 어떻게 시시티브이(CCTV)를 피했는지, 어떻게 무슨 말로 아이를 겁줬는지 가르쳐줍니다. 어린이는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쉽게 유린할 수 있었다는 경찰관의 해설도 덧붙입니다. 급기야는 온 나라의 잠재적 유아강간범에게 여덟 살짜리에게도 성폭력을 가할 수 있다고 알려주는 모양새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너무나도 당연하게 유사한 범죄가 연이어 발생하면, 언론은 더욱더 분노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면서 “왜 이런 끔찍한 범죄가 거듭 발생할까요?”라고 되묻곤 합니다. 정말 그 이유를 모르시나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언론사는 피해자 집에까지 찾아가 그들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 온 국민에게 중계하고 싶어 합니다. 혹자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명을 썼다거나, 이름은 적지 않았다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 봐도 이웃사람이나 학교 친구들은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두 알게 됩니다. 그 가엾은 어린이와 가족의 명예는 짓밟히고, 아이는 미래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도우려 했다고 강변합니다.

우리 사회는 가엾은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헤집지 않은 채 아무도 모르게 이 아이들과 가족을 돌봐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언론사의 판매부수나 시청률에, 그리고 어느 고명하신 분의 명성 쌓기에는 다소 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끝으로 묻고 싶습니다. 과연 내 아이가 피해자라도 이렇게까지 소란스럽게 온 세상에 알려 동정받기를 원할 것인지.

김용세 대전대 법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