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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자살은 ‘질병사일 뿐이다’ / 정희진

등록 2010-07-14 19:54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이 세상에는 몸 둘 곳이 없었을까? 무대 밖으로 영원히 몸을 숨긴 배우의 죽음을 수사한 경찰은, “(음주 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하였다. 이유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살 사건의 90% 이상이 비계획적이지만, 그것이 곧 ‘충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충동’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수사(修辭)할 뿐 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가로막는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자살은, 질병의 경과점 혹은 투병의 과정으로서 자살이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서 방한한 외국 가수를, “한때 우울증에 빠져 방황했지만 재기했다”고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에 빠져? “빠져”는 자발적 탐닉이라는 의미로 대개 마약, 알코올, 도박 등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당뇨에 빠져”, “암에 빠져” 이런 말은 없다. 정신적 불편함(mental disease), 흔히 말하는 ‘정신병’은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육체적인’ 질병과 다르지 않다. 우울증은 독감이나 교통사고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질병’으로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우울증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누가 진짜 미쳤는지”를 생각하게 할 만큼 대단히 모순적이다. 우울증은 결정권(권력)이 많은 기업의 리더처럼 스트레스와 관련 있다는 인식도 있지만, 반대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사치스런 병이라는 통념 역시 집요하다. 이를테면, ‘일하는 건강한 민중’은 우울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편견의 효과는 단 하나, 아픈데 돈 없는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정신과 병원의 문턱만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아픈 이가 누구냐에 따라 우울증은 다르게 인식된다. 천재나 예술가의 우울증은 예민한 재능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평범한 사람의 우울증은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감기라는 비유처럼 가벼운 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우울증 병력자나 환자는 비정상, 비이성, 잠재적 폭력범 등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있다.

이런 모순된 인식의 배후에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해(利害)관계와 담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가적 인식들의 공통점은, 우울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무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무지를 자신은 그만큼 ‘정상’이라는 증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될 만큼 고통스러운 질병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의미를 넘어 ‘패가망신’, ‘인생 실패’, ‘참극’ 등 과도한 낙인을 안게 된다. 새삼 지금 한국 사회의 자살사태(沙汰)를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살을 예방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살 권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고, 또 하나는 자살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겠지만, 나는 후자가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우울증의 고통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나는 자살에 관한 사회적 대책이 자살을 생명과 대립시키는 ‘자살 방지 캠페인’에서, 우울증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고통이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다른 질병에 비해 위로, 간병받지 못한 병사(病死)일 뿐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통증의 해결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자살은 ‘생명 경시 풍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생명의 고통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한 개인의 외로운 처방전이다. ‘병사로서의 자살’은 자살에 대해 관대해지자는 주장이 아니라 예방책에 대한 논의이다. 한때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는 병력이 이후 인생의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소통될 수 있다면, 자살은 줄어들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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