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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불법파견을 장려했던 법의 말로 / 박경신

등록 2010-07-28 20:50수정 2010-07-29 00:22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결국 나와야 하는 판결이 나왔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식의 비정규직 보호법이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은 문자 그대로 고용주들이 고용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고자 만들어낸 편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전체 피고용인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인 미국에서도 비정규직 보호법이 별도로 없다. 기존 고용법이 이미 사내하청이든 도급의 형태로든 노동의 시간·장소·방법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 자는 모두 정규 고용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면서 도리어 노동자-사주 관계를 퇴보시켰다. 바로 편법적인 ‘비정규직’을 양성화·합법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취지에서 법을 만들다 보니 불법적인 상태에서 고용되어 피고용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의 현 상태를 고착화하는 법이 나오게 됐다. 파견노동자 보호법이 그 한 예다. 즉 파견노동이라는 이름하에서는 2년 동안 ㄱ이라는 고용주로부터 노동의 시간·장소·방법을 통제받아도 ㄱ의 피고용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법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2년의 기간이 지난 뒤에도 파견이 허용되지 않은 직종에 대해서는 원청업자의 직접고용 의무도 발생하지 않았다. 원청업자 입장에서는 불법파견을 받으면 합법파견을 받는 것보다 이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직접고용 의무가 발생해도 스스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 한 의미있는 제재도 없는 상황이 유지됐다.

파견노동자 보호법이 아니라 파견노동자 ‘고착’법이었던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파견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노동법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즉 파견이 불허되는 분야에서는 원청업자가 노동의 시간·장소·방법을 통제하는 한 불법파견이건 합법파견이건 고용주로서의 의무가 부과돼야 하나 그렇지 못했다. 더욱이 합법파견의 경우에도 2년 이상 파견노동의 혜택을 얻은 원청업자라면 의미있는 법적 의무가 부과돼야 했건만 스스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 한 의미있는 법적 의무는 부과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은 단 1주일이라도 타인의 노동의 시간·장소·방법을 통제하면 고용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사람이 고용주로서의 의무를 가지도록 하는 사이, 우리나라는 2년 동안 유예를 해주었음은 물론 2년이 지난 뒤에도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무면허운전은 불법운전이므로 합법운전에 적용되는 속도제한이나 음주운전 금지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황당한 법리였다.

이번 판결은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불법파견의 경우에도 원청업자의 고용의무가 발생함은 물론 고용을 하지 않으면 원청업자의 고용자로 간주하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즉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이 그토록 한국철도공사의 직원으로 인정받길 원했지만 ‘KTX관광레저’라는 사내하청업체의 직원으로만 인정받았던 모순을 풀어낸 것이다.

이것은 혁신적인 판결이 아니라 법치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결이다. 최근 용산참사 사건에서 검찰이 ‘증거로 제시하지 않겠으니 피고인들에게 공개하지 않겠다’는 자료에 대해 ‘공개하지 않는 대신 증거로 제시하지 말라’는 제재도 아닌 제재를 내린 적이 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와 비슷하게 당연한 판결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겪는 문제로, 다수자의 문제이다. 사회취약계층 보호를 정치인들이 부르짖어도 사회취약계층을 발생시키는 곳이 노동시장-노동 대 돈의 거래가 이루어지는-임을 간과하면, 이들의 부르짖음은 무의미하다. 파견노동자는 정규노동자에 비해 임금과 노동조건이 열악하다. 다수를 사회취약계층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고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상식을 찾아준 대법원에 찬사를 보낸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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