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10일 ‘일한병합 100년’ 담화에서 “강제병합이 한국민 뜻에 반해 이뤄졌다”며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식민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고도 했다. 간 총리는 ‘병합’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한국 언론도 대부분 그렇게 썼다.
경술국치 100년과 광복 65돌을 맞아 1910년 8월22일 ‘체결’되고 29일 공포된 한국병탄 문건의 명칭에 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일한병합조약’이라 써왔다. 한국에서는 ‘한일합방’ ‘한일병합조약’ 등으로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강제병합’ 또는 그냥 ‘병합조약’이라 부른다.
한·일 양국 지식인들이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국내 언론에서도 ‘한일병합’이나 ‘강제병합’을 공식 명칭처럼 사용한다. 대단히 중요한 역사 오류이다. ‘병합조약’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이를 ‘조약’이 아니라 ‘국치’라 호칭했던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 대한제국이 조약을 체결할 때는 반드시 최종적으로 문건에 어새 또는 국새를 찍고, 황제가 직접 이름자(拓) 서명을 하도록 돼 있었다. 조약이나, 협약에는 모두 그렇게 하였다. 이 ‘문건’에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없다. 국권을 넘기는 막중한 조약에 주권자인 황제의 서명이 없다는 것은 황제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와 매국노들이 다른 것은 조작·강제해도 황제의 친필 서명은 어찌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 임종 직전 궁내부대신 조정구에게 구술로 남긴 유조에서 ‘합병조약’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강제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해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이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1926년 7월8일)
따라서 합병·합방·병합(조약) 따위의 용어는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일제와 매국노, 친일파, 관학자들이 사용해온 용어를 부지불식간에 그대로 써왔을 뿐이다.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일렀다. 우리는 ‘비아’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역사와 선열 앞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일제는 한국을 병탄(倂呑)하면서 용어 문제로 고심했다. 병탄 직전까지 내각과 언론은 합방 또는 합병이라 썼다. 병탄 직후 일본 정부가 ‘병합’(倂合)이라 쓰도록 지시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이 전연 폐멸해버리고 제국영내의 일부로 된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고르기를 원하며,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끝내 적당한 문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아직 일반적으로 쓰지 않은 문자를 고르는 것이 득책이라고 인정하여, 병합이란 문자를 문서에 사용하였다. 이로부터 이후 공문서에는 항상 병합이란 문자를 쓰게 된 것이다.”(슌보공추송회 春畝公追頌會 이토 히로부미전, 하권 1013~1014쪽)
일제가 이렇게 만든 용어가 ‘병합’이다. 사전에도 없는 용어를 만들어서 한국을 병탄한 것을 호도하려 했다. 여기에 ‘강제’란 부사를 붙인다고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한·일 지식인들의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은 그 뜻한 바와는 별개로 ‘병합’을 전제한다면 본질과는 배치된다.
한국은 일제에 ‘병탄’됐다. “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강제로 빼앗아 제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병탄이다. 마땅히 ‘병탄’이나 ‘경술늑약’이라 써야 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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