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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나는 피눈물을 보았다

등록 2010-08-22 21:40수정 2018-05-11 15:09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내일은 오늘보다 좀 시원해지겠지 하면서 지낸 여름이다. 자고 나면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워서 머리 위로 뜨거운 김이 활활 올라가는 듯한 나날이다. 그런데 며칠 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았다.

작가 이반씨의 기자회견을 보면서였다. 도라산역에 걸려 있던 이반씨의 벽화 14점이 본인도 모르게 철거되고 철거하는 과정에서 벽화에 물을 뿌려서 작품이 훼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나 비통했던지 목이 메어 갈라진 목소리로 평정심을 찾아가면서 과정을 설명하는 70살의 작가가 눈시울을 적시는데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니고 피눈물이라고 여겨졌다. 그 벽화가 단순히 돈 몇천만원을 받고 2년, 730일 동안 작업한 벽화가 아님을, 그가 자신의 생명과 작가적 생명을 녹여내어서 그린 통일과 상생을 염원한 일생일대의 역작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반은 1970년대에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가이다. 80년대 이후 많은 작가들이 민중미술 계열의 작품을 할 때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비무장지대에서 생명사상에 천착한 작품을 했다. 각종 퍼포먼스와 이벤트로 우리나라 작가 중에 처음으로 비무장지대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그곳을 그린벨트로 묶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비무장지대를 세계적 생명사상의 메카로 삼고 싶어했다. 2005년도에 통일부의 의뢰로 그가 도라산역에 벽화를 그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반 작가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 20년 동안 해온 비무장지대에서의 작업이 꽃을 피우는구나 싶어서 감격스러웠다.

철거 인부가 동원되어 비 새는 헌 벽 뜯어내듯이 물을 뿌려대며 벽화를 헐어내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내 몸에 칼을 대고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한 작가의 자존심의 문제나 저작인격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작품에 대한 능욕이고 야만이고 겁탈이다. 통일부는 돈을 지급했으니 부수는 것을 포함해서 어떤 짓을 하든 주관 부서의 재량이라고 한다. 나도 원고료 받고 신문에 글을 쓴다. 만약 내 글을 나한테 한마디 양해도 없이 삭제해 버린다면 그게 온당한 일인가. 수백억짜리 국보를 가진 사람이 어느 날 내 돈 주고 산 것이니 내 마음이라고 백주에 도끼로 부숴버려도 괜찮은 것인가.

민중적이고 어둡다는 여론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서 철거했다고 하는데 민중적 대신 귀족적 관료적 그림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남북분단의 어두운 역사를 명랑쾌활하게 그려야 한다는 말인가. 분수 만들고 스케이트장 만들어 놀이터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벽화 대신 달랑 걸어놓은 흔하디흔한 천지 그림에 누가 감동을 할 것인가. 여론조사 과정을 거치고 전문가 의견을 들었다는데 그 내막이 샅샅이 밝혀져야 하고 전문가라는 면면들의 전문적 판단도 공개되어야 한다. 설사 그런 여론이 있었다 하더라도 철거가 우선일 수는 없다.

나는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상이 정말 못마땅하다. 궁궐 대신 거리에 나와 앉은 세종대왕을 바라보기가 민망하다. 좋게 말하면 금색을, 나쁘게 말하면 똥색을 뒤집어쓰고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기막히다. 주변 경관하고도 안 어울리고 오로지 크고 번쩍거리게만 만든 그 작품을 여론 조사하고 전문가 의견 들어서 철거하자고 주장하면 아마도 서울시민 절반쯤의 동의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일단 철거부터 하자고 할 수는 없다. 이 만행을 생각하면 염천에도 후두둑 한기가 든다. 이 사태에 입 다물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한다는 사람들의 침묵이 나는 무섭다. 대한민국의 예술인들이 이 일에 자신들이 능욕당한 것 같은 비통함과 모욕감으로 감정이입이 안 된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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